여후의 부친 여공은 남의 모함을 받아 유방의 고향인 패현으로 피신하였다. 유방은 마을의 하급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 연회에 참석한 유방을 본 여공은 그의 비범한 관상에 끌려 자신의 귀한 딸을 유방에게 출가시켰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행운이 유방과 여씨 집안에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 주었음은 물론이다.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등도 여후의 교묘한 계책에 속아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팽월은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간청했다. 여후는 그를 꼬드겨 수도인 장안으로 데리고 와 모반을 꾀했다고 음모를 꾸며 모살하였다. 경포도 먼저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망하였다. 노관은 북방의 흉노족에게 투항했다가 살해당했다.
여후의 잔인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유방 사후 후궁인 척부인에 대한 혹독한 처벌일 것이다. 척부인의 사지를 자르고 두 눈을 파고 두 귀를 먹게 하고 벙어리로 만들었다. 돼지우리에 던져 "인간 돼지"라고 불렀다. 척부인의 소생인 유여의도 독살했다. 모친의 잔인함에 충격을 받은 여후 소생의 혜제는 충격에 병이 깊이 들었고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여후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고 자신의 조카인 여산, 여래, 여록을 조정의 중신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토록 하였다.
여후는 임종 시 조카인 여산과 여록에게 자신이 죽은 후 빈틈없이 병권을 장악해 조정의 정변에 대비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나 여후가 죽자 진평과 주발은 유씨 일족과 힘을 모아 조정 안팎의 여씨 세력을 일소하였다. 유방의 아들인 대한 유항을 문제로 옹립하였다. 문제와 그의 아들 경제의 치세 기간 나라는 안정되었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역사상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불리는 선정이 베풀어졌다. 경제의 아들 유철이 웅재대략의 황제로 평가 받는 한무제다. 공신과 후궁을 무참히 학살한 여후의 바람과는 달리 여씨 천하는 일장춘몽이 되었고 유씨 왕조가 부활되었다. 역사는 때로는 사필귀정의 길을 밟기도 한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