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시대, 남자가 사는법(19)]한번 탄 내인생, 다시 탈 숯인가 버릴 연탄재인가
[아시아경제 최창환 대기자] 머리 위에 함지박만한 보름달이 걸렸다. 하늘채로 이사간 친구 '을'이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펜트하우스'보다 순우리말인 '하늘채'가 더 맛깔스럽다. 저녁 자리는 하늘이 보이는 테라스에 차렸다. 을은 고추와 파를 쬐끔 심어놓은 테라스를 '텃밭'이라고 부른다. 시원한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내 얼굴만한(누군가 흉보려고 한 얘기다) 보름달 옆으로 별들이 흐른다.
"야외에서 구워먹는 고기맛이 쥑이지." 을은 하늘채 텃밭에서 숯불을 붙이려고 애쓴다. 맛난 고기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갔다. 혼자 살면서 손님을 치르려면 손이 부족하다. 숯불 당번이 내몫이 됐다. 오늘의 주인공은 숯불이다.
'참나무는 제 몸을 태워서 숯이 된다. 숯은 참나무의 주검이다.'
정숙의 시 '숯'의 일부다. 참숯을 주검에서 부활시키려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을 한다. 숯불은 부활한 숯이다. 신문지와 골판지를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젠장." 더럽게 안된다. 신문지와 골판지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숯은 연기만 잠시 비추다가 곧 잠잠해진다. 하긴, 죽은 걸 살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번개탄 없어? 그래야 불이 붙지." 연기와 눈물이 범벅이 되지만 성과는 없다. "숯 봉지 안에 당연히 있는 줄 알았지. 근데 없어. 썩을." 숯 봉지를 뒤집자 활성탄이 나온다. "어! 있었네." 활성탄을 사용하자 숯이 주검에서 부활해 숯불이 된다. 중년남성은 부활의 시기다. 죽은 것을 살려내야 한다. 부활을 돕기위해 필요한 목록을 준비해야 한다. 활성탄, ㅇㅇ그라 등. 한 번에 말고 조금씩 찾아가 보자.
'그 주검이 다시 자신을 활활 태우면 불은 그 힘 두배로 강해진다.'
다시 정숙의 '숯'이다. 숯불로 부활한 주검은 두 배로 강해졌다. 열기만 강해진 게 아니라 향기도 있다. 숯불이 살아난 무렵 다른 벗들도 찾아왔다. 술, 고기, 야채 등을 가지고 왔다. 알아서 파무침도 만들고 겉절이도 버무린다.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운다. 참숯 향기로 버무려져 노릿하게 익은 고기에서 육즙이 흐른다. 마늘, 상추, 깻잎, 된장, 소금 , 기름, 달빛, 별빛, 눈빛, 바람, 대화, 촉감, 미소, 술, 세상, 세월. 오감과 모든게 어울려 하룻밤이 빙빙 돌아 간다. 숯불을 둘러싸고.
힘든 친구들도 많다. 나라와 사회와 가족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돈도 직위도 없고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친구 '병'이있다. 세상에는 갑보다는 을이, 을보다는 병이 많다. 기진맥진한다. 안그런척 하면서 큰 소리 친다. 옛친구들을 만나면 주사가 심해진다. 친구들이 웃으면서 받아준다. 안쓰러운 마음이 크다. 술 먹으면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를 큰소리로 읊조린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림이었느냐.'
다 타버린 연탄재인가. 아니면 두 배로 타오를 숯인가. 무엇엔가에 쏟은 열정을 강조하기 위해 안 시인은 연탄재를 택했나보다. 모두 다 태워버린 연탄재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탈 게, 태울 게 더 많이 남은 게 우리네 삶이다.
숯이 됐다는 것은 성숙한 인생이 된다는 의미다. 가마 속에서 몇천도의 열기를 묵묵히 참으며 견뎌냈다. 속으로 타들어 가도 겉으로 그 열기를 모두 뱉어내지 않았다. 미처 태우지 못한 열정이 어딘가에 온전히 남아있어야 숯으로 익는다. 속이 다 타버려도, 어깨를 비비고 부딪쳐도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다. 나를 온전히 남겼다는, 재가 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살아남은 인생이다. 잘익은 숯이다. 연탄재에는 "다 타셨군요"라고 경의를 표해주자. 절대 발로 차지 마라.
나를 다시 태울 불쏘시개가 뭔지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있다. 이것 저것 해보자. 여기저기 들춰보고 뒤집어 보자. 찾고 나면 쉽다. "어, 있었네" 한다.
내 주변을 얼핏 봐도 참 다양하다. 두부협동조합, 귀농, 반농반도, 재취업, 공부, 베트남유학, 지역문화해설가, 지역카페, 1인출판사. 친구들이 하거나 준비중인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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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붙이기가 힘들지 한 번 타기 시작하면 강력하다. 은근과 끈기에 향기에 화력을 겸비한다. 다 탄 듯 하지만 뒤집어 보면 깊은 곳에 아직도 뜨거운 불길이 숨어 있다. 고기를 좀 더 올려놓고 빈 잔을 채운다. 좋은 친구, 숯불에 구운 고기와 달빛에 적신 소주는 잘 어울린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태우지 못하고 간직한 내 젊음의 숯검댕이를 생각해 본다. "건배! 미처 못 태운 열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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