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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애인과 연인의 차이(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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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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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을 물어보았다. 왜 물어봤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것의 다름이 요즘 내 마음에 걸려있다. 애인과 연인. 얼핏 보면 비슷한 말로 같은 맥락에 넘나들 수 있을 것 같은 말인데 묘하게 차이나는 말의 빛깔과 의미 영역.

두 번 중 하나의 대답은 이랬다. “우선 연인에는 고풍(古風)이 느껴져요.” 빙고!
애인은 입말(口語體)로 자주 오르내리고 연인은 글말(文語體)과 좀 친한 듯 하다.

다른 하나의 대답은 “연인보다 애인이 가벼워 보여요”다. 그것도 틀리지 않았다.

고풍과 문어체의 진중함이 ‘연인’이란 말에는 묻어있고, 새끼 손가락을 치켜들며 ‘이거 있냐?’할 때의 ‘이거’는 필경 ‘애인’이다. 입말이다 보니, 때가 묻고 속되어졌나 보다.
그러나 내가 찾던 대답은 아니었다. 연인과 애인이 기묘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의 숫자이다. 연인은 두 사람, 애인은 한 사람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 연인은 두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일 수 있고, 애인은 흔히 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인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이란 노래엔, ‘애인’이 아니고 ‘연인’이다. ‘다정한 애인이 손에 손을 잡고’라고 말하면 약간 어색해진다. “어제 나는 슬펐네. 그 여자는 떠났네”라고 시작하는 송창식의 노래의 제목은 ‘연인’이 아니고 ‘애인’이다. 물론 ‘나의 애인이여’를 ‘나의 연인이여’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이럴 땐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그 둘은 연인이야’를 ‘그때 그 둘은 애인이야’라고 말하면 표현이 엉성해보인다. 이럴 때 뒤 문장에선 ‘그때 그 둘은 서로 애인 관계야’라고 말해야 매끈해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애인은 한 사람만 가리킬 수 있고, 연인은 두 사람을 가리킬 수 있을까. 또 왜 애인은 살아남고 연인은 슬슬 사라지고 있을까. 애인에 붙은 사랑 愛. 연인에 붙은 그리워할 戀. 생래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은 살아남는데 다소 흐릿하고 아리송하고 애틋하기만 한 그리움은 퇴장하고 있는 중일까. 사랑이란 말은 ‘섹스’라는 말과 넘나들기도 한다. “요즘 전, 남편과 밤에 사랑 한번 못해봤어요.” 이렇게 앙큼하게 섹스란 말을 돌려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움은 여기에 대체할 수 없는 말이다. “요즘 전, 남편과 밤에 그리움 한번 못해봤어요.” 이상하지 않은가. 사랑은 섹스하는 행위에 가깝고 그리움은 멀찌감치서 하는 생각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섹스하는 행위’는 소유의 암시를 낳고, '멀찌감치서 하는 생각'은 내적 자장(磁場)을 공유한 관계를 암시하게 된 게 아닐까. 사랑은 내가 소유하는 어떤 대상과 그 소유에의 열망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리움은 서로 좋아하지만 현재로선 시원하게 소통된 건 아닌 간질간질함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사랑과 그리움으로 풀어놓으면, 애인과 연인의 차이가 슬쩍 짚이기도 한다. 애인은 바로 그 사랑하는 대상을 콕 찍는 말이지만, 연인은 나와 당신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축축하고 끈끈한 눈빛의 교차에 방점이 있다.

연인이 사라지고 애인이 남는 것은, 사랑을 에두르던 거품같은 것들, 그 관계의 은은함이 사라지고, 직정(直情)이 발호하는 현상과 관련있지 않을까. 사랑이, 둘이서 하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소유해야 하는 에고이스트적인 강박으로 바뀌어감. 바로 그 시대적 증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과 우정을 비교하면서, 사랑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정은 절대로 혼자서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고 미셀 투르니에가 말했을 때, 그 비교에는 애인과 연인의 차이에 대한 성찰도 숨어 든다. 짝사랑이란 말은 있지만 짝우정이란 말은 없다. 사랑은 일방과 쌍방이 다 통용되지만 우정은 쌍방이라야만 가능한 말이다.

애인에 숨는 것은 사랑이라는 일방적인 감정이다. 혼자서 좋아해도 내 마음 속에선 애인이다. 송창식의 노래가 그렇지 않은가. ‘혼자서 먼길 떠나버렸네’라고 슬퍼하면서도 그를 나의 ‘애인’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인은 서로 좋아하는 관계의 감정인 ‘우정’이 숨어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우정과 사랑은 동성(同性)과 이성(異性)의 감정으로 구분지어지는 건 정확하지 않다. 관계의 감정이냐 일방의 감정이냐로 따지는 게 옳다. 애인은 사랑의 대상이며, 연인은 우정의 쌍방을 가리킨다.

연인이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 것은, 관계의 저쪽을 성찰하는 조심스러움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I love you.’면 끝이다. 내가 너를 좋아하면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아니, 좋아하든지 말든지 난 널 좋아하겠어.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Boxing Helena)’는 그 사나운 소유욕이 어디까지 가는가를 무섭게 보여준다. 남자는 사랑하는 헬레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그녀의 팔과 다리를 잘라버리고,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채 음식을 떠먹인다. 헬레나는 그러는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린다. 관계가 없는 사랑은 천국을 보여주는 대신 저 메마른 지옥을 보여준다. 물론 극단적인 예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저런 집착으로 나아가지 않고, 쉽게 돌아선다. 소유란 사실 번복도 쉽다. 인형을 바꾸듯, 혹은 고장난 기계를 버리고 새 것으로 사듯, 사람도 새것으로 구입하면 된다.

연인이 사라지는 것은, ‘관계’의 실종일 수 있다. 사랑에서 성관계만 남고 혹은 사회적이고 대외적인 관계만 남고, 꼭 있어야할 무엇인가가 사라졌다. 이전에 중시되던 내밀하고 집중적인 그리움의 예열 말이다. 옛사람들이 애(愛)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체온, 그리고 기본적인 체력으로 연(戀)을 둔 것이다. 너무 서둘러 ‘내 것’ ‘내 애인’으로 나아간 관계가 부실해질 수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냥 사랑에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고 믿고 아끼는 우정이 오래 넘나드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통찰. 그것이 관계를 중시하는 ‘연인’이란 말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지금, 연인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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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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