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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과학에서 '최초'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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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초등학생 영어교육 광풍이지만 필자가 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에 가서 영어를 처음 배웠다. 외국어를 늦게 배울수록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문화는 더 큰 충격이자 수수께끼인데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최상급 표현이다. 영어에서는 최고, 최상, 최대, 최초 등의 표현을 쓸 때 곧잘 복수로 쓰는데 예컨대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one of the greatest writers)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냥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하면 될텐데 굳이 길게 표현하니 신기했다. 정말로 최고가 여러개 있으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지(가), 최고는 하나지만 겸손을 떠는건지(나), 최고를 가리기 어렵거나 귀찮아서 대충 표현하는 게으름인지(다), 최고의 의미는 나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인지(라).

어릴 때 어머니에게 자식 중에 누구를 제일 아끼냐고 질투어린 질문을 하면 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며 은근슬쩍 넘어가셨다. 결혼해서 철이 들자 어머니는 열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지만 그 중에도 좀 더 아픈 것이 있고 덜 아픈 것이 있다고 하셨다. 뒤돌아보니 친정어머니가 제일 아끼는 딸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으면 충분한 답이 되지 않았을까. 어찌됐거나 제일 아낀다고는 하셨으니.
소치올림픽 알파인스키에서 동계올림픽 78년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 금메달이 나왔다고 한다. 기록을 100분의 1초까지 재는 기준에 따라 공동 금메달이 됐는데, 기술로는 100만분의 1까지 잴 수 있어 실제 누가 가장 빠른지 가릴 수는 있다. 아무튼 이 두 선수 각자는 올해 가장 빠른 스키 선수 중 한 명이 됐다. 혹시 혼자 금메달을 땄으면 선수 개인의 기쁨은 두 배가 됐을지 모르나, 선수를 응원하고 뒷바라지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동시 금메달로 인한 기쁨의 총량은 크게 늘었겠다.

그런데 이 영어의 복수형 최상급 표현이 잘 통용되지 않는 곳이 과학기술이다.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은 인류에게 '가장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준 과학자에게 노벨상을 수여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기술 혁신은 가장 빠르고, 가장 가볍고, 가장 튼튼한 것을 만들기 위한 경쟁의 역사이다. 즉 최고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최고를 이루거나 만들라는 것이다.

이렇게 단수형 최상급이 지배하는 과학기술에서 재미있는 것은 앞서 추측 중 (가)의 경우임에도 단수형을 쓴다는 점이다. 20세기 중반 과학사회학을 개척한 로버트 머튼은 근대 과학에서 비슷한 이론, 원리, 개념에 서로 다른 과학자들이 함께 도달하는 '동시 발견 (multiple discoveries)' 현상을 연구한 논문에서 264건의 동시 발견 사례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179건이 2명, 51건은 3명이 동시 발견했고 심지어 9명의 과학자가 동시 발견한 경우도 2건이었다.
이처럼 동시 발견이 흔한데도 과학에서 단수형 최상급을 강조하는 이유는 과학자 사회의 특이한 보상구조와 밀접히 연관된다. 지식이란 신발처럼 한 켤레 더 만들 때마다 돈이 들고 내가 신으면 남이 못 신는 게 아니다. 한번 창출되면 여러 사람이 쓴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고 그 양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과학적 지식의 패러독스는 과학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짜로 더 널리 나눠줄수록 오히려 더 확고하게 그 아이디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발견에서 '최초'가 중요한 것은 누가 가장 먼저 해당 지식을 만들어냈는가를 따지는 것이 그 지식에 대한 일종의 소유권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다시 궁금해진다. 근대 과학의 보상 구조가 복수형 최상급을 장려했다면 지금 과학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노벨상이 없어도 과연 노벨상급 연구가 이루어졌을까?

김소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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