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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 이성복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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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이성복의 '입술'

■ '입'이라고 발음하면 입이 꼭 닫히지만 '입술'이라고 발음해보면 꼭 닫힌 입이 그만 살짝 벌어지고 만다. 혀가 살짝 앞으로 나오면서 입 속에 있던 공기를 살짝 밀어내며 꼬리 달린 바람소리를 만든다. 입은 자아(自我)이지만 입술은 관계 지향적인 것인가 보다. 우리에게 입이 야한 느낌을 지니게 된 까닭은, 입술을 서로 붙이거나 혀를 교합시키는 접문(接吻)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시인 박인환은 이름도 잊은 사람의 입술을 기억한다. 산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이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사랑까지 사라진 이승 너머에서도 그 입술이 시인의 가슴에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 한 사람의 입술 위에는 한 사람의 입술이, 혹은 몇 사람의 입술이, 기억으로 와 앉아있게 마련이다. 더운 숨이나, 서늘하고 꺼칠한 슬픔이나, 급박하게 부딪치며 입술이 눌렸던 그날 밤이 황홀하게 혹은 아프게 입술 위에 새겨져 있다. 모든 입술은 키스로 쌓아올린 애절한 금자탑이며 갈망과 이별의 연대기이다. 입술이 입술을 사랑하는 것, 입술이 입술이 기억하는 것만큼, 순정하고 애절한 정념이 또 있을까. 이성복은 그 순애보(脣愛譜)를 영원 속에 펼쳐놓았다. 괜히, 읽는 입술이 마르며 타오른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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