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이가 없을 것 같지만, 태어나보니 이미 별 볼일 없는 존재들도 많다. 우리가 냄비를, 냄비 속에 들어 있는 국이나 찌개보다 더 존경해본 적은 없지만 냄비받침 세계에서는 확실한 갑(甲)이다. 냄비가 없다면 저 받침이 무엇에 필요할 것인가. 냄비의 엉덩이가 지표의 어떤 것과도 사귈 수 없을 만큼 열 받았을 때, 그 분노를 어루만져주는 받침은 더할 나위 없이 요긴하고 착하지만, 냄비의 엉덩이가 불에 달궈지지 않는다면 냄비받침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정신머리 없는 수많은 인간들이 늘 필요할 때 필요한 물건을 찾지 못해 분개하는 상황들 가운데 냄비받침만한 것도 없으리라. 막 끓은 냄비를 놔야 되는 찰나에 찾아보면 평소엔 멀쩡하게 있던 것이 딱 고 순간엔 없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무테이블에 놨다가 검은 나이테를 만들어내고 유리에 놨다가 탁자에 지진 가는 사태를 만난다. 이런 경험들이 트라우마로 축적되면서, 아마도 냄비받침이 필요 없는 세상이 곧 출현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몇 번 실수하면 아예 그 실수 자체를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냄비 아래에 어떤 희한한 물질을 달아서, 냄비 위를 끓일 땐 달아오르다가, 아래에서 열이 정지되는 순간 놀랍게도 냉정을 유지하는 그런 테크노피아가 도래할 것이다. 그때는 냄비받침은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어진다.


하여, 이 냄비받침은 자기가 살 여지를 만들어놨다. 냄비받침은 이미 기능으로만 버티는 물건이 아니다. 냄비받침의 디자인은 가히 예술을 뺨친다. 받침 속에 들어가는 온갖 다양한 예술적 표현들은, 저것이 냄비받침이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폰 케이스 모으듯, 접시를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듯, 자체의 강렬한 매력을 발광하게 되었다.

AD

어떤 사람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내 인생은 세상을 군침 돌게 하는 '요리'에서도 벗어났고, 그것을 끓여 올리는 '냄비'에서도 하차한 지라, 이제 냄비받침에 비근하는 라이프 개념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말인데, 저 냄비받침에 유난히 마음이 가는 것이다. 냄비받침이 냄비보다 똑똑하려 해선 안 된다. 하지만 냄비받침이 제 구실을 못하면 부엌일이 돌아가겠는가. 늙은 집사처럼 묵묵히 살아가지만, 너 또한 천하가 낸 요긴한 존재이며 그놈의 기술이 나오기까지는 당분간 실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향상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