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캠프' 흘러간 연예인에 낚이더니 결국
[컬처파크]'힐링캠프'는 땟국물이나 헹구는 세탁소다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새 학기가 곧 시작돼 청춘들이 학교로 돌아온다. 그러나 살인적인 등록금, 높은 월세에 주눅 든 청춘들의 한숨이 깊다. 지금 청춘들은 한 해 돈 벌어 학교 다니고, 다시 휴학해도 졸업마저 막막하다고 토로한다. 졸업한들 취업은 또 어떠랴. 그래서 청춘들은 날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한다.
헌데 힐링의 멘토는 보이지 않는다. 어느 방송국의 '힐링' 프로그램은 흘러간 연예인(정치인)의 과거 전력이나 헹궈주는 세탁소로 바뀐 지 오래다. '청춘 콘서트'를 열던 정치인은 기약없이 떠났다. '아픈 청춘'을 위로하던 상아탑의 스승도 잠잠하다. 수행에 여념 없던 스님마저 잠시 나타나 몇마디 거룩한 말씀(?)을 남기곤 홀연히 자취를 숨겼다. 다들 청춘을 열광케 한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지금 열풍을 몰고 온 '힐링의 전도사'들은 청춘 곁에 없다. '힐링'에 낚인 청춘들만 고스란히 버려진 꼴이다. 이젠 마냥 상처를 떠벌여도 되는 잔치판인 줄 알았다가는 더 큰 상처를 감수해야할 형편이다. 허나 그들을 탓할 게 못 된다. 애초에 그들에게 시대의 상처(아픔)를 치료할만한 콘텐츠가 있었는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차피 자비로운 부처님조차 세상을 '힐링'하지 못했는데...
실상 '힐링' 열풍이 분 뒤로 세상은 더 궁벽해졌다. 날마다 손가락으로 말하고, 대답하며 '나 홀로 세계'에 '망명'하는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반면 힐링 장사꾼들이 득실댄다. 마음의 상처를 물건으로 다스리라고 '힐링' 딱지를 붙인 상품들도 판친다. 알고 보면 힐링 상품이란게 땀범벅에 눈물, 콧물 다 쏟아붇는 길거리 '매운 짬뽕' 만큼도 위무가 안 되는 게 수두룩하다. 차라리 복통난 배 위에 셀프로 옥도정끼를 바르니만 못할 지경이다. 상품 소비로서의 힐링은 피곤한 마음에 당장 고농축 카페인 에너지 음료를 마시고 한순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깨어나본들 청춘들 손에 달랑 '스마트 폰' 하나 쥐어진 것 말고 남은 게 없겠지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가난한 청춘들은 부모에게조차 죄의식에 빠져 있다. 거꾸로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이건 청춘이 만들고 싶어서 만든 감정이 아니다. 엄밀히 청춘들에겐 힐링의 책임이 없다. 힐링은 풍요의 또 다른 산물이다. 당연히 풍요를 가진 사람이 가해자다. 그게 아니라면 청춘들의 상처는 스스로 자해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가 ? 상처는 사람의 관계 즉 사회구조에서 발생한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하고는 의무를 다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은 청춘에게 아픔과 상처를 안긴 가해자 편에 가깝거나 '장삿속'이 뻔한 이들과 내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청춘들이 아픈 게 당연하다'고 위로로 건네지던 달콤한 말이 악마의 속삭임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건 배고픈 사자가 사슴 엉덩이를 거부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힐링'으로 포장된 말은 세상의 모순을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 힐링 코드는 문화, 취업, 관광ㆍ휴양ㆍ여행, 출판, 교육, IT, 음식료, 금융, 의료 등 전 산업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웰빙', '로하스' 등 그저 그런 한 때의 신드롬보다 더 강력하게 변주된 형태로 다가와 '치유'에는 댓가와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장사꾼에게 있어 세상이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조차 신산업이고 성장동력이다. 그래서 장사꾼에겐 힐링도 시장에서 상품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다.
가령 장사꾼은 아픈 사람에게 반려동물을 안겨준다. 그리곤 개들만이 따로 누릴 수 있는 특식이나 호텔을 만들어 들이댄다. 사람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개에게 스테이크를 먹인다. 천박한 상술이라고 해도 마케팅의 세계에서 다 그렇고 그런 메커니즘이다. 힐링도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치료를 가장한 상품의 일종인 셈이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서로 상처 입은 이들이 연대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힐링한 사람이란게 고작 "터놓고 얘기했더니 좀 해소됐네"하는 정도다. 그게 정말 힐링이라면 수천년전 첫 '힐링'을 창시했던 부처께서 중생에게 펼친 대자대비한 말씀에 세상 사람 모두 피안에 이르렀어야 맞다. 지금 '힐링'은 아픈 사람에게 약탈의 한 형태다.
힐링이 약자 편이었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정치인의 약속은 벌써 실현됐을 것이며, 청춘들이 기꺼이 즐겁게 아파했을 것이다. 또 "힐링하라고 해서 상처 다 까발려놓고, 사먹으라는 음료도 매일 퍼먹었는데 더 허전하다"거나 "손에 스마트폰 한대만 들려 놓고 다 떠나버린 것은 또 무엇이냐 ?"고 묻지 않을 것이다. '힐링'이 고통과 갈등의 현장에서 자스민 꽃 하나 함께 들어주는게 아닌 한 당초에 전도사들이 편 향기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소설가가 설파한다.
"갈등의 시대에 공동체 혹은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진정한 힐링일 리 없다. 상처는 사람의 관계속에서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한 만큼 사람속으로 돌아가야 치유할 수 있다. 물건(혹은 서비스) 몇개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또한 말로 달래지는게 아니다. 더 많이 놀고, 더 느려지고, 아둥바둥 살지 말고, 함께 삶을 나눠야 한다. 진정한 힐링이란 그 콘텐츠가 서릿발 가득한 벌판을 맨발로 걸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낙관주의, 공동체를 향한 연대, 이웃에 대한 희생, 생명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어야 다시 희망을 꿈꿔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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