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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처음잡은 참치, 이승만 만나러 부산서 비행기 타고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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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한국 원양어업 시작

-대한민국 商道, 그 빛과 그림자의 뜨락<끝>
- 원조자금으로 美서 배 들여와
- 제동산업 지남호 1957년 출항
- 윤정구 선장 김재철 보조항해사
- 선원 27명과 108일간의 사투

우리 어선들이 잡은 참치를 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번째 부터)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육영숙 여사

우리 어선들이 잡은 참치를 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번째 부터)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육영숙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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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잿더미 속에서 바다의 개척 또한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바다 개척에 처음으로 주목한 자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었다. 한국전쟁 때 일본으로 피난을 가 잠시 체류하고 있을 때 다각도로 검토하고 짜낸 그의 신규 사업 계획안이기도 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본에서 대규모 선단을 들여와 근해 어업을 크게 벌인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우리의 어선 보유량이나 어업 기술은 너무도 보잘 것이 없었다. 국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어업 경쟁력에서는 일본에 한참이나 뒤져있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잿더미 속에서도 어업은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일본에서 중고선 600여척을 들여오기로 하고 절차에 착수했다.
그러나 박흥식의 이런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박 아무개를 통해 경제침략을 하고자 하는 숨은 뜻이 있슴네다” 하는 대통령 이승만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근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나간 원양어업의 첫 시작점은 1957년 지남(指南)호에 의해서였다. 해방 이후 원조 자금 32만6000달러를 주고 미국에서 들여온 선박으로, 냉장실은 물론 방향과 수심, 어군 탐지기 등 각종 첨단 장비를 고루 탑재하고 있는 250t급 강선이었다. 지남호의 선박명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거기서 부를 건져 오라'는 뜻으로 이승만이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지남호는 도입 직후 해무청의 관리 아래 주로 연근해 시험 조업에 이용되고 있었다. 그러다 이후 설립된 제동산업㈜으로 넘겨졌다. 제동산업의 심상준 사장은 처음부터 원양어업을 염두에 두고 인수한 것이었다.

심 사장은 곧바로 미 국무성에 줄을 댔다. 파트너는 윔스였다. 해방 이후 미 군정장관 더치의 특별보좌관을 역임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심 사장의 연락을 받은 윔스는 사모아의 밴 캠프사에 한국 어선이 잡은 참치를 사줄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그러나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한국이 그동안 참치를 어획한 경험과 실적이 없는데다, 이미 계약을 맺고 있는 일본 어선들의 어획만으로도 안정적인 통조림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심 사장은 단념하지 않았다. 윔스에게 재차 전문을 띄웠다. '전후 일본 경제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인건비의 상승 폭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다. 또한 경제 성장에 따른 국민소득 증대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힘든 작업을 기피하게 만든다. 이렇게 될 때 과연 일본이 앞으로도 밴 캠프사가 원하는 대로 어로 활동을 계속할 것으로 보는가?'

윔스는 이 전문을 들고 밴 캠프사를 다시 찾았다. 밴 캠프사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가동을 위해선 '제2의 일본'이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결국 한국 어선에 기회를 줘보자는 대답을 이끌어냈다. 역사적인 인도양 시험 조업에 나설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1957년 6월26일 부산항 제1부두 해양경찰대 강당에서 해경 악대의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대한 출어식이 열렸다. 이날 출어식에는 상공부장관 김일환, 해무청장 홍진기, 수산업중앙회장 이한창 등이 참석해 '이번 출어가 수산한국의 미래를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장도를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사흘 뒤 지남호는 두 달여 동안의 조업 중에 223M/T의 참치(다랑어)를 어획해 15만달러어치를 수출한다는 부푼 꿈을 안고서 뱃고동 소리도 요란하게 부산항을 출항했다. 우리 나라 원양어업사에 첫발을 내딛는 인도양 참치연승(긴 낚시 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바다 속에 늘어뜨려 물고기를 잡는 방식) 첫 시험 조업을 위해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나가본 적이라곤 없는 대양이었다. 참치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참치를 잡으러 나선 머나먼 항해였다. 그날 지남호에 승선한 윤정구(훗날 오양수산 사장) 선장과 김재철(동원그룹 회장, 전 무역협회장) 보조 항해사를 비롯한 27명의 선원들은 일찍이 신대륙을 찾아 파로스항구를 떠나던 콜럼버스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부산항을 출항한 지남호는 다음날 일본 시모노세키에 입항했다. 그곳에서 7월10일까지 급유 및 보급과 수리를 마친 뒤 11일 다시 출항해, 17일 첫 어업 기지인 대만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이튿날 대만 동쪽 먼 해역에서 어장 탐색을 위한 첫 투망을 실시했다. 선원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참치는 아니더라도 상어라도 잡혔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물을 끌어올렸으나, 실망스럽게도 결과는 허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 근해와 싱가포르 근해로 조업지를 옮겨 시험 투망을 계속했지만 결과는 역시 참담했다.

더구나 연료마저 바닥나고 있었다. 이제는 참치를 잡으러 인도양으로 나갈 수도, 그렇다고 부산항으로 귀항할 수도 없는 실로 난감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다행히 싱가포르에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천연고무를 수입하던 한국무역진흥회사였다. 지남호는 거기서 2500달러를 빌려 급유를 하고 선원들의 식량과 함께 선수품을 보충한 뒤 8월11일 최종 목적지인 인도양을 향해 다시금 출항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14일, 마침내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 해역에 도착하여 광복절이기도 한 이튿날 새벽 5시에 역사적인 첫 투승을 시작했다.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낚시를 던졌다. 하지만 경험이 있는 자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상어연승 조업이나마 경험을 했지만, 연승의 원리도 모른 채 배를 탄 초보자들 일쑤였다.

따라서 조업은 서투르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선원들은 자료를 일일이 들여다보며 거기에 적혀있는 그대로 투승을 따라했으나 그야말로 흉내를 내는 수준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투승 이후 4~5시간이 지나자 조바심 속에 낚시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빈 낚시 줄만 하염없이 올라왔다. 선원들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저마다 말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 어디에선가 와! 하는 함성소리가 들렸다. 선원들은 함성소리에 일제히 시선을 빼앗겼고, 누군가는 자신이 잡고 있던 줄을 내팽개친 채 소리 나는 쪽으로 냅다 뛰어갔다.

다음 순간 그들은 낚시 줄을 따라 수면 위로 펄떡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거대한 어체를 발견하곤 또다시 함성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흑백 사진 속에서 보기만 했던 바로 그 참치였던 것이다.(실제는 새치였다)

선원들은 자신의 키만한 참치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저 신기해서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서둘러 손질한 다음 냉동실에 보관해야 하는데도 저마다 다음 작업을 어떻게 할지 몰라 우왕좌왕해야 했다.

선원들의 함성 속에 진행된 이날 조업은 당시로선 가히 성공적이었다. 어획량은 0.5t으로 그리 많진 않았으나, 순수 우리 기술과 우리 선원들에 의해 얻어진 첫 결실이라는데 자못 의미가 컸다.

그럭저럭 첫날 조업이 모두 끝난 직후 지남호 선장은 본국으로 무전 연락을 취했다. 광복절인 이날 한국원양어업사의 첫 장을 연 뜻 깊은 낭보를 어서 고국에 전하고 싶었다. 소식을 접한 제동산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휴일 당직근무 중이던 해무청에서도 쾌재를 불렀다.

지남호는 그 날 이후에도 인도양에서 보름여 동안이나 조업을 계속했다. 어획량은 하루 평균 0.5t 안팎으로 꾸준히 잡아 올렸으나,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실 물이 문제였다.

선장은 하루라도 더 조업할 요량으로 마실 물을 제한시켰다. 양치질과 식용 이외에는 식수 사용을 금했다. 선원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목이 말라붙고 얼굴마다 흰 소금으로 뒤덮여갔다.

드디어 8월30일, 이제는 밥 지을 물 밖에는 남지 않았다. 싱가포르로 귀항을 서둘러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지남호는 싱가포르에서 급유와 함께 식료품을 보충한 뒤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뱃고동을 울리며 대양으로 떠난 지 108일 만인 10월3일이었다.

지남호가 인도양에서 건져 올린 참치 어획량은 총 50여t 남짓이었다. 전체 어획량의 80% 이상이 고가로 수출할 수 있는 황다랑어였으며, 일부 눈다랑어와 새치도 섞여 있었다. 이 참치들은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전량 미국으로 보내졌다. 참치의 대미 수출길이 처음으로 열린 것이었다.

지남호의 이런 성공적인 첫 시험 조업은 외신으로 먼저 국내에 전해졌다. 대통령 이승만도 싱가포르에서 발행되고 있는 영자신문을 통해 알았다.

이 신문은 한국의 지남호가 처음으로 인도양까지 출어하여 참치를 잡아 올린 뒤, 본국으로 귀항 길에 급유를 받기 위해 싱가포르에 잠시 입항했다 떠났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또 지남호의 성공적인 시험 조업으로 한국도 이제는 본격적인 원양어업에 진출케 되었다며 지남호의 사진까지 곁들여 실었다.

이승만은 신문을 본 즉시 비서관 박찬일을 불러 자세한 경위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지남호가 부산항에 도착한 이틀 뒤였다.

박찬일은 해무청 수산국장 지철근과 시험 조업단장으로 지남호에 승선했던 어로과장 남상규를 경무대로 불러들였다. 이승만은 이들로부터 출어 경위를 보고받고 제동산업의 심 사장을 만나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연락을 받은 심 사장은 좌불안석이었다.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직은 어려운 지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금싸라기 같은 외화를 들여가며 무모하게 먼 인도양까지 나갔다가 자칫 선원 사고라도 발생했으면 어떡할 셈이었느냐고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심 사장은 궁리 끝에 참치를 직접 선보인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부산에 급히 연락을 취해 잡아온 참치 가운데 가장 큰 놈을 골라 공수케 했다. 연락을 받은 지남호는 새치도 넓은 의미로 참치라고 불렀기 때문에 가장 큰 새치를 골랐다. 심 사장은 대한항공의 전신인 KNA편으로 공수해온 참치(새치)를 냉동차에 싣고 경무대로 들어갔다. 한데 자신을 대하는 이승만의 태도가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심 사장, 자네가 정말로 인도양에 나가 참치를 잡아 미국에 수출했나?”

심 사장은 그렇다고 대답한 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이승만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그렇지만 너무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될 거야. 특히 일본이 알면 훼방을 놓으려고 할 거야.”

미국에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바다의 닭고기'라는 참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이승만은, 우리의 힘으로 참치를 잡았다는데 만족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일본의 방해로 일을 그르칠까봐 걱정했다. 힐책 대신 격려의 소리에 배석했던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했다.

“언제쯤이나 우리 손으로 참치를 잡아보나 했는데 드디어 해냈구먼. 그러나 조용조용히 일을 추진하라구.” 이승만의 이 같은 신신당부에 따라 참치 시험조업의 결과는 한동안 보도 통제에 묶여야 했다. 국내에서는 일체 기사화되지 못한 뒷얘기를 남겼다.

한편 이날 경무대 뒤뜰에는 비행기를 타고 올라온 참치 한 마리가 선을 보였다. 180cm에 이르는 거대한 어체를 처음으로 보는 순간 참석자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을 비롯하여 재무부장관 김현철, 복흥부장관 송인상, 주한 미국 대사 다우링, 해무청 수산국장 지철근, 제동산업 심 사장 등이 참석하여 참치를 배경으로 기념촬영까지 했다.

이승만은 참치를 보고 또 보면서 직접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견스러운 듯 심 사장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이 튜나(참치) 나줄 수 없나? 토막 내서 친구들에게 줘야겠어. 우리 나라 사람이 잡은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이튿날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토막 낸 참치를 주한 외교관들에게 선물했다. 이승만은 며칠 뒤에 있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참치를 잡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한국원양어업 50년사의 시작점은, 엄밀히 말해 본격적인 상업조업으로의 원양어업이 이뤄졌던 것은 그 이듬해 남태평양의 사모아에서였다. 인도양에서 돌아온 지 두 달여 뒤인 1958년 1월 윤정구 선장 등은 다시금 지남호를 이끌고 부산항을 출항하여 남태평양 사모아 근해에서 1년3개월여 동안 조업을 했는데, 첫 항차에서만 날개다랑어와 눈다랑어, 황다랑어 등 100t가량의 어획고를 올렸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제2지남호와 제3지남호가 잇달아 조업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원양어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작가 박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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