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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 통화개혁 '개악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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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막바지 헌돈 홍수…하루에 물가 15배 올라


대한민국 商道, 그 빛과 그림자의 뜨락
조폐공사 동래공장, 300명 임직원 구금상태서 헌병 경비 받으며 비밀작업
구원 100원=신권 1환 화폐가치 떨어져 사재기 극성 환율절하… 국회도 외면

동란 중 지배인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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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6ㆍ25 한국전쟁 중에 경제계는 다른 무엇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다. 산업 시설은 초토화되고 생산이 마비된 상태에서 물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지면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해방 직후에 비해 무려 18배나 폭등을 했다.

전쟁 비용이 무한정 투입되면서 통화량마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날인 1950년 6월24일 559억원에 달하던 화폐 발행고는 1952년 말에 1조원을 돌파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요와 공급, 통화량 등 모든 측면에서 악성 인플레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 김유택은 어찌나 인플레가 극심했던지, 시장에선 돈을 가마니로 싣고 다녀야만 거래가 이뤄질 정도로 화폐가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3년 넘게 치러진 전쟁도 38선을 사이에 둔 채 교착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휴전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젠 전후 복구와 산업 부흥 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 할 시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1년 가을, 재무부장관 백두진과 한은 총재 김유택(당시는 수석 부총재)이 머리를 맞댔다. 전쟁으로 누적된 인플레를 청산하고 아울러 전쟁 복구와 산업 부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통화개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은 내부에서도 통화개혁에 따른 실무자가 낙점됐다.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와 미국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27살의 젊은 조사과장 김정렴(훗날 재무부장관)이었다. 김정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통화개혁 사례를 수집하고 그 가운데 독일ㆍ네덜란드ㆍ일본 등의 성공 사례를 정리한 대외비 조사 자료를 만들었다.
이듬해 9월 김정렴은 난데없이 재무부장관 백두진의 호출을 받았다. 장관실에는 이미 한은 총재 김유택과 부총재 송인상이 배석해 있었다. 백두진은 통화개혁이 불가피한데 해낼 수 있을지 김정렴에게 물었다. 김정렴은 자신이 있다고 대답한 뒤 '비밀을 누설하면 총살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김정렴은 함께 작업할 동료로 같은 과의 배수곤(훗날 상업은행장) 대리를 점찍었다. 두 사람은 부산 해운대와 송도의 가정집, 호텔 등지를 옮겨 다니며 극비리에 통화개혁안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직속상관인 조사부장 이상덕에게는 '두 사람을 특별히 쓸 데가 있으니 아무 간섭하지 말라'는 총재의 엄명만 내려졌을 따름이다.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자, 조사부장 이상덕과 발권부장 김병옥도 비밀작업에 합류시켰다. 이때까지도 통화개혁이 은밀히 추진되고 있다는 비밀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백두진과 김유택, 송인상, 이상덕과 김병옥, 김정렴과 배수곤,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 등 고작 8명이 전부였다.

마침내 그 이듬해 정월, 통화개혁안이 최종 마무리됐다. 백두진과 김유택, 송인상 등이 확정된 안을 재가받기 위해 대통령의 임시 집무실이었던 경남도지사 관사로 향했다.

세 사람을 맞이하는 이승만의 심기가 결코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전부터 백두진은 이승만에게 통화개혁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했으나 그 때마다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더구나 그 취지에 대해서는 이해를 한다면서도 100대 1로 절하하겠다는 통화 단위에 대해서 왜 1대 1로 하면 안 되는지 반문했다. 또한 일정 한도를 초과하는 금액은 2?3년간 사용을 동결한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없어 했다.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함부로 제한할 수 없다고 제동을 건 것이다.

재무부장관과 한은 총재는 진땀을 빼야 했다. 통화개혁을 성공하려면 일정액의 통화를 유통 과정에서 흡수해 통화량을 줄여야만 한다는 설득과 함께 입씨름이 장시간 오간 끝에야 마지못해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장관의 소신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슴네다."

이승만은 재가 란에 '가만(可晩)'이라고 사인을 해주었다.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오던 통화개혁이 무산될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는 순간이었다.

막상 이승만의 재가를 받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새로이 발행하게 될 지폐의 제조에서부터 보관, 운송 등 문제가 산적했다. 시간이며 비용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무엇보다 보안유지가 힘들었다.

결국 'US프린트'를 지폐종이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절 조선은행은 경제 혼란과 치솟는 인플레를 막기 위해 통화개혁을 실시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대형 정책은 새로이 들어설 한국 정부에 넘긴다는 입장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만일에 대비해 미국에서 예비은행권인 US프린트를 만들어 이미 들여다 놓은 터였다. 군정청은 이 예비은행권이 도착하자 포장된 상태 그대로 봉인해 조선은행 지하 금고에 보관시켜 두었다. 그러다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옮겨와 조선방직 창고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송인상은 백두진의 전화를 받고 김병옥과 함께 급히 조방 창고로 달려갔다. 창고 안에는 US프린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상자 하나를 열자 돈 다발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액수를 확인한 뒤 이상이 없자 다시금 봉인한 다음 창고를 나섰다.
그러나 남은 문제는 또 있었다. 통화개혁에 따른 대통령의 담화문과 긴급 통화조치 포고문 등의 인쇄물을 과연 어디서 찍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 때 김유택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조폐공사 동래공장이었다.

그는 국방장관 신태영에게 부탁해 헌병 50여명을 차출했다. 헌병들은 동래공장을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헌병들에겐 '이 시간 이후 외출하는 자는 무조건 체포 구금하고, 찾아오는 이는 즉시 돌려보내라'는 별도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런 다음에야 백두진과 김유택은 조폐공사 사장 나정호를 불러들였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나정호에게 백두진은 주머니 속에서 돌연 권총을 꺼냈다. 나정호의 얼굴이 단박 하얗게 질렸다.

"나 사장,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긴 곧 국가의 지상명령이오. 만일 누설되는 날엔 각오하시오."

그 날 이후 동래공장 300여 명의 임직원들은 사흘 동안 완전히 구금된 상태에 들어갔다. 예의 담화문이며 포고문, 서식 등의 비밀 인쇄 작업에만 매달려야 했다.

드디어 디데이 하루 전날인 1953년 2월14일 저녁, 김유택은 한은 남자직원 전원에게 송도에 자리한 미진장호텔로 집결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명목상으론 한은 총재가 마련한 (구정)설날 축하연이라고 둘러댔다. 김유택은 호텔에 모인 한은 임직원들에게 비로소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온 통화개혁 단행을 알리면서 명예를 걸고 부여된 과업을 책임지고 완수하자고 다짐했다.

이때부터 한은에 통화개혁대책본부가 설치됐다. 동시에 수송과 교환을 담당할 요원들이 한밤중에 새 지폐 다발을 싣고서 각 지방으로 출발했다.

몇 시간 뒤인 15일 0시를 기해 전격적으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새벽 라디오 전파를 타고서 전 국민에게 비로소 알려졌다. 김유택은 아침 6시 KBS방송에 출연해 통화개혁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이날 발표한 재무부장관과 한은총재의 공동 담화문에 따르면, '전쟁 피해로 인한 생산력의 저하와 전쟁비용 증대로 인한 통화의 팽창 때문에 물가 사정은 악화되고, 일정한 화폐 소득자의 실질 소득은 다달이 저하되고, 부익부 빈익빈 징후는 농후해가고, 원재료와 제품은 사장되고, 생산 의욕은 떨어지고, 반면에 고리대금업자만 발호하며, 일면 돈의 가치를 제대로 한 장 한 장 세어보지도 않고 돈의 분량을 대충 달아서 주고받고 하는 따위의 천금(賤金) 사상이 만연되고, 지폐의 홍수 속에서 거래의 단위만 터무니없이 불어나 유통과 결제 상에 많은 불편만 끼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구권의 통용을 일체 금지시키고, 구권 100원에 신권 1환의 비율로 교환해주되, 일정 한도액을 초과하는 금액은 구권과 수표 등을 모두 금융기관에 2~3년간 강제 예입시킨 다음 생활비조로 1인당 500환 한도 내에서 신권으로 교환해주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화개혁은 실로 일반 국민의 경제생활과 재산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초헌법적인 조치였다. 더구나 일반 국민들은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불안해서 정부의 통화개혁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엔 없었다.

제아무리 전쟁을 치루고 있는 도중이라지만 새벽에 날아든 뜬금없는 통화개혁 뉴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다름 아니었다. 통화개혁이라는 긴급 사태를 처음 겪어보는 일반 국민들은 이 같은 날벼락에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때마침 음력 설날을 끼고 있는 바람에 이틀 동안의 공백은 일반 국민을 더욱 조바심나게 만들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곳곳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갖가지 루머가 난무하는 가운데 매점매석과 싹쓸이 사재기와 물자 은닉 등으로 시장은 일시에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건 공산당보다 더 악랄한 수법"이라고 목청을 돋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무부와 한국은행 사람들은 서울에 미리 집을 사놨다"더라 "모 고위층이 소금을 몇 십만 가마니나 사놨다"더라 등 별의별 소문이 떠돌았다.

그런 가운데 일정 한도를 초과하는 금액은 2~3년간 사용을 동결시켜 유통 과정에서 흡수해 통화량을 줄여나간다는 당초의 정부 목표는 처음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거액을 쥔 구권 소지자들이 되도록 많은 신권을 확보하기 위해 교묘한 방법으로 구권을 농촌에 밀반출시켜 불법 교환을 일삼은 탓이었다.

작가 홍성원은 신문연재소설 '남과 북'에서 정부의 갑작스런 통화개혁은 경제 전체를 일대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으며, 일반 국민들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극심한 인플레를 경험해본 그들은 단순한 통화개혁만으로는 화폐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화폐의 액면만 달라졌을 뿐 신화인 한화 역시 조만간 폭락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화폐개혁이 발표되자 나라 안은 전에 볼수 없던 큰 혼란만 찾아왔을 뿐이다. 화폐 가치를 신용할 수 없는 국민은 현금을 쥐고 있기보다는 다투어 물건을 사들였다. 구화를 신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깊이 숨겨놓았던 비상금까지도 모두 풀려나오기 마련이었다.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했던 시장에는 구화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물건 값이 하루 사이에 4배에서 15배까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여기에 부채질을 더한 것은 신화와 달러와의 환율이 60대 1로 절하된 데 있었다. 화폐의 홍수가 시장으로 밀어닥치자 상인들의 태도 역시 급속도로 달라졌다. 그들은 물건을 창고 속에 숨겨둔 채 어지간한 값으로는 물건을 팔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바꿔야 될 화폐이기 때문에 구화는 그들에게도 달갑지 않은 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넘어야 할 산은 따로 있었다. 긴급금융조치 법안에 대한 국회 심의에서 동의를 얻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국회는 당장 격론이 벌어졌다.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면서 통화개혁을 문제 삼고 나섰다. 백두진과 김유택, 상공부장관 이재형이 나서 의원들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의원들은 예금 동결 비율을 한사코 완화하려 들었다. 정부에 힘을 실어주어야 할 여당조차 한 목소리를 내면서 정부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여권에서는 이렇다 할 주도 세력이 없이 다만 족청계, 비족청계, 신라회 및 친여 무소속 등의 파벌이 서로 힘을 겨루고 있었다. 백두진은 과거 조선은행 이사 시절 민족청년단 재정담당 이사를 맡은 적이 있어 족청계로 분류됐다. 비족청계의 중진 배은희 의원과 신라회 총수인 국회의장 장택상은 "정부 원안대로 해주면 백두진만 영웅이 된다"며 자파 의원들을 독려했다.

결국 여권에서조차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한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예금 동결 비율을 75%나 삭감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상 백지화된 수정안이 통과된 것이었다.

통화개혁을 주도했던 백두진과 김유택은 훗날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십년 동안의 공든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재형은 국무회의에서 딴 목소리를 냈다. '이번 통화개혁은 금융인들만의 생각으로 입안을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보다 광범위하게 실업인과 상공인들을 참여시켰더라면 더 좋은 안이 나왔을 것'이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6.25 부산 임시본부

6.25 부산 임시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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