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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화 감독, 금지약물 무혐의에도 왜 침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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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모래성만 쌓은 꼴이 됐죠.”

정만화 코오롱 마라톤 감독의 한숨은 유난히 길었다. 지난해 복기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지도자 인생에서 최악의 해였던 까닭이다. 시련이 닥친 건 6월 16일이었다. 강원경찰청 마약수사대는 도핑검사에 검출되지 않는 약물을 선수들에게 투약해 경기력 향상을 꾀했다는 혐의로 국가대표팀 코치로 일하던 정 감독을 수사선상에 올려놓았다. 논란으로 불거진 약물은 조혈제(혈액 속의 헤모글로빈 수치를 높여주는 약)였다. 경찰은 훈련장을 수차례 방문, 조사하는 한편 선수들이 자주 찾은 충북 제천의 모 재활의학과의원의 진료기록을 압수해 분석했다. 혐의를 뒷받침할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이 입수한 진료기록에 대해 담당의사는 항암치료를 받는 장모와 이웃에게 사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국도핑위원회(KADA)도 선수들이 투여한 것으로 알려진 조혈제가 금지약물가 거리가 멀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기관 관계자는 “모든 조혈제가 금지약물에 해당되는 건 아니다”라며 “경찰에서 문의한 페로빈 주가 여기에 해당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 감독의 지도를 받는 지영준과 이선영은 2007년부터 실시한 도핑테스트에서 한 차례도 양성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 약물 파동에서 비롯된 파국

수사는 결국 무혐의로 내사 종결됐다. 하지만 정만화 감독과 선수들이 입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특히 선수들은 연이은 수사로 훈련에 제동이 걸려 페이스가 엉망이 됐다. 헝클어진 분위기는 덤. 의혹을 받던 이선영은 은퇴를 고민했다. 부상에서 회복 중이던 지영준도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마라톤 국가대표팀 한 관계자는 “선수들이 1달 이상 심각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며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라고 말했다. 한 달여 뒤 열린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의 성적은 기대에 부응할 리 없었다. 기대를 모았던 지영준, 이선영 등은 모두 국가대표팀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다. 제자들의 낙마를 지켜봐야 했던 정 감독은 속이 끊었다.

-지난해 약물 파문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지도했던 상지여고 선수들이 코오롱 고교구간 마라톤대회에서 대회 신기록(2시간25분05초)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문제는 국가대표팀에 코치로 합류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적잖은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렸고 6월 약물 파문까지 겪어야 했다. 지도자 인생에서 최악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약물 소식을 접한 건 언제였나.

▲지난해 5월 초다. 이전에도 비슷한 소문을 접해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모 신문의 허위보도와 함께 일이 커졌다. 솔직히 아무런 정황 없이 경찰 수사가 진행될 줄 몰랐다.

-이전 소문의 내용은 어떠했나.

▲상지여고 선수들에게 금지약물을 먹인다는 헛소문을 들었다. 강제로 수혈을 시킨다는 말을 접하기도 했다. 그래서 힘없는 제자들은 매 대회에서 도핑검사의 타깃이 됐다. 몇몇 선수들은 악의적인 시선에 부담을 느껴 일부 대회를 불참하기도 했다.

-왜 이런 소문이 돌았을까.

▲우리 제자들의 진학이나 스카우트 등에 불만을 느낀 지도자들이 시기를 느껴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 같다. 공석이던 코오롱 감독을 내가 맡는 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여기에 가세했고.

-계속된 경찰 조사로 훈련에 많은 애를 먹었을 텐데.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작성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형사들은 훈련장과 숙소를 수차례 찾아왔다. 도저히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국가대표팀을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지영준의 국가대표팀 탈락에 약물 파문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컨디션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계속된 스트레스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됐다. 러닝에서 집중력도 크게 떨어졌다. 억지로 뛰다보니 몇몇 부위에서 부상도 발견됐고. 아직 모든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2012 런던하계올림픽을 향한 준비를 부상과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 마라톤계는 왜 입을 닫았나

‘아니면 말고’식이다. 강원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한 마라톤 관계자의 제보를 받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조혈제 샘플, 처방내역 등의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 문제는 내사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의혹이 새어나온 점이다. 정만화 감독, 지영준, 이선영 등은 모두 치명적인 명예훼손을 입었다. 잇따른 수사로 훈련에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봄부터 준비한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의 출전이 불발되기도 했다. 대한육상경기연맹 고위 관계자는 “의혹에 경찰이 수사를 벌이는 건 당연하다”라면서도 “정확한 정황이 파악되기 전까진 선수들의 훈련에 피해를 줘선 안 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사건이 불거지자 내부 조사에 착수, 악의적인 제보에 따른 결과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연맹이 주목한 건 공석이 됐던 코오롱 마라톤 팀 사령탑이었다. 정 감독은 이전부터 자리를 꿰찰 유력한 후보로 손꼽혔다. 일부 지도자들은 이에 반발했다. 코오롱과 깊지 않은 인연, 시기 등이 그 주 이유였다. 제보자를 발본색원하겠다던 대한육상경기연맹의 방침은 그래서 어렵지 않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고 특별한 징계 또한 가해지지 않았다. 서상택 대한육상경기연맹 홍보이사는 “변호사 등과의 논의에서 육상계 내부 문제인 탓에 법적 조치를 내리기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라며 “연맹과 관련된 보직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진상조사위원회의 면담에서 정만화 감독, 지영준 등도 고발 등으로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라고 덧붙였다. 왜 정 감독은 입을 굳게 다물었을까.

-금지약물 파문으로 고생이 많았을 텐데.

▲처음 소식을 접한 뒤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화가 났다. 후배인 제보자 A씨를 한 대 치고 싶을 정도였다. 혐의를 사실처럼 내보내는 매체들도 미웠다. 무혐의를 받은 뒤에는 약이 오르더라. 사건이 불거졌을 때 벌떼처럼 공격하던 매체들이 정작 무혐의에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경찰 수사에 불만이 많을 것 같은데.

▲선수들은 대회 출전 때마다 무작위로 도핑검사를 받는다. 한 번도 양성반응을 보인 적이 없는데 왜 경찰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수사에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수사를 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적잖은 후유증에 시달릴 것 같은데.

▲선수들에게 약을 하나 먹여도 보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훈련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선수들이 감기에 걸려도 마음 놓고 약을 먹지 못한다. 과한 우려로 효과 빠른 처방을 알고도 버려야 현실이 안타깝다.


-보약도 먹지 못할 것 같다.

▲금지시킨 지 꽤 됐다. 주목하는 눈이 많아 어떤 것도 먹이지 못하고 있다. 선수 지도에 에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제보자 A씨에 대한 처벌에 대해 다소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더 이상 마라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게 넘어갈 줄은 몰랐다. 대한육상경기연맹에서 최소 풍기문란과 관련된 죄를 적용할 줄 알았다. 그 점이 조금 서운하다.

-지난해가 악몽과 같이 느껴질 것 같다.

▲모래성을 쌓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지난 3, 4년 동안 금지약물 복용과 비슷한 소문이 육상계에 파다하게 돌았다. 이번 수사를 통해 결백을 입증한 것 같다. 더 이상은 헛소문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 시즌을 앞둔 기분이 남다르겠다.

▲성적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 편인데 1월 1일 큰맘을 먹고 강원도 강릉으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속으로 빌었다. 선수들이 훈련에 집중해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해 달라고. 아팠던 만큼 한국 마라톤이 한층 성숙했으면 좋겠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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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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