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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한섬지기와 옥상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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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낮에는 공무원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농사를 지으셨다. 우리 집 논 가운데는 '한섬지기'라는 게 있었다. 논 한 마지기에 나락 한 섬이 나오는 땅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강에 가까이 있었다. 홍수가 나서 강둑이 터지면 우리 논은 어김없이 모래밭이 되곤 했다. 척박한 땅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퇴근 후면 어김없이 삽을 어깨에 메고 한섬지기로 갔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을 하시다 어두운 개울물에 삽을 씻었다. 개울둑에 앉은 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검은 하늘을 처다보시곤 했다. 돌아와서는 멸치 국물에 애호박을 넣은 수제비로 저녁을 먹었다.
어린 나, 아니 내 또래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겨울철에는 나무를 하러 다녔다. 지게는 사치였다. 장남의 전유물이었다. 새끼줄 허리에 묶고, 낫 한 자루 쥔 채 험한 산을 오르내렸다. 화력이 좋은 오리목과 소나무를 통째 베어 왔다. 먼 산길을 걷는 내 어깨는 나무 무게로 빠지는 듯했다. 주린 배는 산밭에 있는 고구마와 무로 채웠다. 보리 타작을 할 때는 괴롭기 짝이 없었다. 보리의 까끄라기가 온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힘들었다. 대학에서 농활 가자고 할 때 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다. "너나 가세요"라고. 너무도 힘들었던 기억에 다시는 농사를 짓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내게 농활 가자고 권하는 친구 녀석들은 밉상 그대로였고 꼴도 보기 싫었다.

본래 촌놈인 나는 이제 50을 바라보고 도시에만 삼십 수년을 살았다. 도시 사람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런 변화에 걸맞게 나는 농사 짓는 법이나 철마다 뭘 심어야 할지도 거의 다 잊었다.
그래도 한섬지기 논으로 갈 때 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풀냄새와 흙냄새, 산과 들을 뛰어다닌 발바닥에 와 닿은 흙의 감촉에 대한 기억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모난 마음, 각진 마음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 없는 직업을 구하고 또 거기서 20년 넘게 밥을 먹으면서도 모난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자평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나만 품지는 않을 것이라고 감히 말한다. 이른바 서울 사람들이 말하는 '시골' 사람들은 다 알 것이며,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서 도시로 나온 사람들은 잘 알 것이라고 믿는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가 시내 건물 옥상에서 꽃양배추와 보리 등을 기르는 '옥상텃밭'을 가꾸는 '옥상농원 시범사업'에 참여할 곳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한섬지기와 흙냄새, 풀냄새와 흙의 감촉이 기억을 스쳤다.

늦었지만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옥상에 50~100㎡ 규모의 공간이 있는 서울 시내 복지관과 유아원, 노인정, 학교 등 다중이용시설이 신청자격이 있다고 한다. 건물 옥상이 배추와 보리가 핀 텃밭으로 바뀔 날을 상상해보라. 콘크리트 상자만 즐비한 도시의 빌딩이 노란 배추꽃 위로 나비가 날아다니고 보리밭 골에서 처녀 총각이 연애하는 곳으로 바뀌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풍족해진다. 한섬지기가 아니라 반섬지기도 안되는 땅이 줄 효과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입시지옥에서 고통받는 아이들, 게임에 중독된 청춘들, 패배로 울분을 참지 못하는 청년들, 흙의 기운이 필요한 직장인과 생명이 시들어가는 노인들에게는 흙의 생명력과 치유력이 필요하다. 옥상텃밭은 그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되찾을 작은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오로지 일등과 일류를 고집하면서 아이들을 밤낮없이 학원으로 내모는 부모들의 모나고 각진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이런 밭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박희준 부국장 겸 사회문화부장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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