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간혹 추상적 신념을 토대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능력이 출중한 변호사라는 믿음은 화려한 경력이나 대단한 학력보다는 재판에서 이기는 한 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훨씬 쉽게 만들어지며, 기상예보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정교한 이론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적중률을 경험하면 어렵지 않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언제나 타당한 결과만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은 경험 이상의 실증적 탐구와 연구가 병행돼야만 비로소 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의성 또한 이를 비껴갈 수 없다. 창의성은 재능을 가진 소수만의 전유물이라는 믿음이나 창의적이 되려면 다양한 생각을 해야만 한다는 믿음은 정말 진실일까? 우리들의 경험은 주저 없이 '그렇다'는 대답을 정답으로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창의성이란 애초에 소수의 전유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로 짜여 있다. 왜냐하면 창의성이라는 현상은 '독창성'이라는 요인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독창성, 즉 새로워야만 창의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특정 문제에 있어 창의적인 사람이 하나로 제한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을 연구했던 사람이 실제로는 수만 명이었으며 이들 모두가 그 원리를 완성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 분야에서 창의적인 사람은 오직 하나 '아인슈타인'뿐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상대성 이론의 결론에 스스로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발견이 아인슈타인 이후라면 그들은 실제로 대단히 창의적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창의적인 사람으로 불리지 못한다. 결국 창의성이라는 왕관은 극소수에게만 제공되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창의성이 정말 재능 있는 소수만의 전유물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경험적 근거로 대답되기에는 여전히 많은 여백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창의적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많은 생각이 필수라는 믿음은 어떨까? DNA를 발견한 왓슨과 클릭은 그 구조에 대해 엄청난 양의 가정을 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저 2중 나선 한 가지만을 가정했을 뿐이었다. 결국, 창의성의 발현은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하느냐가 아니라 그 사회 전체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시도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순히 현상을 요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상의 원인을 찾아 이를 토대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원리를 도출하기 위해서이다. 창의성은 소수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때 만들어진다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상식적인 경험을 토대로 형성됐다. 따라서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주저 없이 소수의 인재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다. 혹시라도 소수의 인재가 아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창의적일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하는 것은 그저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라는 확신을 갖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창의적인 사람이 재능 있는 소수에 국한된다는 우리의 경험은 창의성의 발현구조가 애초에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된 결과일 뿐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많은 생각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창의성은 결코 개인적 수준에서 발휘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명백한 경험이 만들어내는 위험한 함정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모두가 창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이 이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창의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비용이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이런 현실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해 보다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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