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준 기자의 CINEMASCOPE - '코쿠리코 언덕에서'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일본에서 ‘스튜디오 지브리 Studio Ghibli’(이하 지브리)라는 이름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85년 창립한 ‘지브리’는 ‘천공의 성 라퓨타’(1986)를 시작으로 이후 내놓는 작품마다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격찬을 받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자리매김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의 컴퓨터 그래픽(CG)과 3D로 도배한 애니메이션이 대세인 지금, 전통적인 2D 셀 애니메이션을 고집하는 ‘지브리’는 유일하게 할리우드에 대적할 수 있는 2D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보루다.


태상준 기자의 CINEMASCOPE - '코쿠리코 언덕에서' 원본보기 아이콘
‘코쿠리코 언덕에서 コクリコ坂から’(감독_미야자키 고로, 28일 개봉)(이하 코쿠리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자 ‘지브리’의 유일한 실패작으로 꼽히는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2006)을 연출한 미야자키 고로의 두 번째 감독 작품이다.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은 영화의 원작을 쓴 소설가 어슐라 K. 르 귄은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 조차 불만에 가득 차 시사회 중 자리를 뜰 정도로 실망스러웠던 애니메이션이다. 데뷔작으로 물을 먹은 미야자키 고로는 ‘코쿠리코’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을까? 안타깝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AD

‘지브리’가 발랄한 ‘현재’ 혹은 모험과 마법으로 가득한 ‘과거’의 판타지 세상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코쿠리코’는 전후 일본의 사실적인 과거 세계로 돌아간다. ‘코쿠리코’는 일본이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던 1963년 요코하마 어촌을 배경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깃발을 올리는 소녀 우미(나가사와 마사미 분)와 그 깃발을 바라보는 소년 슈운(오카다 준이치 분)의 가슴 떨리는 사랑의 설렘을 그린다. 1963년이라는 배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3년은 일본이 고도 성장의 시기에 진입하기 직전의 시기로, 과거의 잔재를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모두 없애기 시작하던 때다. 우미와 슈운은 철거를 앞둔 오래된 학생회관 건물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내고자 한다. 아련한 과거의 흔적을 되살리고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메시지다.


‘코쿠리코’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지난 3월 11일 일본을 휩쓴 대지진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2차 대전 직후를 이겨낸 과거 세대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잃은 젊은 세대들에게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것 같다. 우미와 슈운의 ‘출생의 비밀’이 극 중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거나 급하게 문을 닫는듯한 엔딩 등 단점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칠순 노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묵직한 그림자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역설적으로 미야자키 고로의 흔적은 ‘코쿠리코’에서 거의 찾아낼 수 없다는 말도 되겠다. ‘코쿠리코’는 제작자 미야자키 하야오만이 보이는 영화다.

태상준 기자 birdcag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