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잡아야 산다지만.. 승자없는 PB 전쟁
특유의 역동성과 창의력으로 우리나라 금융시장 발전을 주도해 온 증권 산업이 모멘텀을 잃은 채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위탁매매(브로커리지) 업무는 물론이고 기대를 모았던 투자은행(IB) 분야에서도 절대적인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수익성은 날로 떨어지고 있지만 자산관리 사업이나 해외 진출 전략에서도 돌파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를 못 찾고 있는 우리나라 증권 산업의 현주소를 앞으로 모두 8회에 걸쳐 정밀 진단함으로써 이들이 다시 도약할 필요충분조건을 모색해 본다.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한 달 임대료가 1억원을 훨씬 넘는 국내 최고가 빌딩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증권사들 사이에서 이 곳은 '전쟁터'로 불린다. 10억∼50억원씩 맡기는 초고액자산가(VVIP)만 상대하는 증권사 영업점이 이 건물에 세 곳이나 입주해있기 때문이다. 다음달 18일에는 미래에셋증권도 합세해 모두 네 개의 증권사가 한 건물 안에서 격전을 벌일 예정이다.
자산관리 시장을 둘러싼 증권사들의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증권사들은 부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값비싼 빌딩이나 호텔에 영업점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자산가들 사이에서 평판을 쌓은 우수 프라이빗 뱅커(PB)를 경쟁사에서 빼오기 위해 고액의 연봉도 아끼지 않는다.
증권사들이 자산관리 시장에 발 벗고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업영역에서는 도무지 성장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사업인 브로커리지(위탁매매) 업무의 퇴조는 이미 10년이 넘었고, 한 동안 짭짤한 수익을 안겨줬던 채권 트레이딩도 금리상승기에 접어들며 여의치가 않다. IB(투자은행) 부문에서 역시 잇따른 딜 실패로 업무확장이 어려운 상태. 반면 자산관리 분야는 펀드에서 랩어카운트, 주가수익증권(ELS), 헤지펀드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시장 수요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VVIP 대상 자산관리 영업도 불과 1년여 만에 레드오션이 돼가는 형국이 됐다. '빅5(삼성, 대우, 한국, 미래, 우리)' 증권사들이 앞 다퉈 '부자동네'에 몰려들어 영역확장에 열을 올린 결과다.
삼성증권은 현재 강남파이낸스센터, 호텔신라, 코엑스인터컨티넨탈, 서울파이낸스센터 등 초고가 건물 4곳에 VVIP 영업점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안에는 반포와 부산까지 추가해 관련 점포를 국내 증권사 가운데 가장 많은 6개로 늘릴 계획이다.
서울 을지로 센터원 빌딩과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등 2개 VVIP 점포를 갖고 있는 미래에셋증권은 다음달 강남파이낸스빌딩센터를 오픈할 예정이며, 여의도와 압구정동, 강남에 VVIP 영업점이 있는 한국투자증권은 올해 하반기 강북지역 중심구와 부산에도 각각 지점을 개설한다는 방침이다. 강남구 대치동과 부산 해운대 센텀빌딩에 VVIP점포를 갖고 있는 대우증권 역시 추가적인 점포 개설을 위해 장소를 물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들은 전문 인력 투자에도 큰 돈을 들이고 있다. VVIP 영업점은 적게는 10명 안팎에서 많게는 30명까지 주식, 파생상품, 펀드, 부동산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필요한데, 전국 주요 지점에서 차출하는 한편으로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하는데도 열을 올리는 중이다. 거액을 맡길 수 있는 VVIP의 수가 많지 않다보니 직원 한 사람이 관리하는 고객은 5명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출 기여가 큰 고객을 유치하지 못하면 점포 운영비와 인건비를 뽑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일부 대형 증권사의 경우는 VVIP 영업점의 수탁액 데이터를 부풀리는 등 필요이상의 경쟁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다 보니 탄탄한 영업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경쟁사의 PB를 한꺼번에 스카우트 해 오는 일이 잇따르고, '시장질서 혼탁하게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자산관리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삼성증권의 경우 올 상반기 신한은행에 이어 하나은행에서 각각 3명, 7명의 PB를 한꺼번에 영입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았다. 미래에셋증권은 지난 3월 센터원 지점을 오픈하면서 하나은행 PB 3명을 데려와 은행 측의 빈축을 샀다.
돈이 많이 드는데다, 증권회사의 브랜드 가치에 큰 영향을 받는 사업이라 업계 안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 증권사의 관계자는 "중소형 증권사는 자산관리 시장에서 이미 설 자리를 잃었고, 대형 증권사로의 시장쏠림이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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