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부터 '꾸벅'…"게을러서가 아니에요"
[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9살 여자아이가 병원을 찾았다. 1년전부터 조는 증상이 나타났다. 낮에 책을 볼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걸어가다가 잠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감정기복이 심하고 크게 웃으면 양 다리 힘이 빠져 주저앉는 증상이 동반됐다. 홍승봉 성균관의대 신경과 교수(삼성서울병원)가 아이의 수면습관을 검사했다. 전형적인 기면증 진단이 나왔다. 약물치료를 통해 6년이 지난 지금 주간졸음증은 거의 사라졌다. 웃다가 다리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은 완전히 고치지 못했으나 많이 좋아졌다.
#같은 병원을 찾은 43세 남자도 비슷한 경우다. 밤에 충분히 잔 것 같은데 낮에 갑자기 졸리며 쓰러질 것 같은 경험을 반복했다. 자다가 소리를 지르는 식의 행동장애도 있었다. 약물복용으로 증상은 호전됐지만 완치법이 없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걷다가 자고 먹다가 자고…
중요한 회의나 시험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개는 '게으르다' 거나 '자기 절제를 못하는 사람' 정도로 취급한다. 하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의 졸음은 습관이 아니라 '뇌'의 문제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주간 졸음은 열대야 등 외부 환경에 의한 수면부족이나 코골이와 같이 수면의 질이 나빠서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졸음의 정도가 지나치고 근육에 힘이 갑자기 빠지는 '탈력발작'이 동반된다면 심각한 신경과 질환인 기면증(嗜眠症)을 의심해봐야 한다.
◆각성 호르몬 부족이 원인인 듯
기면증의 원인은 '히포크레틴'이란 각성 호르몬의 부족으로 판단되지만, 정확한 발병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치료 역시 약물을 이용한 대증요법과 수면의 질을 향상시키는 행동요법이 전부다. 완치되진 않는다.
홍 교수는 "인종적인 발병률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체질적 요인이 의심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와 관련 있다는 가설도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전체 인구의 0.4∼0.6%가 기면증을 앓는 것으로 보고돼 유병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0.5% 정도로 추정돼 일본과 마찬가지로 유병률이 높은 편이다.
기면증 환자의 뇌를 촬영해보면 신경세포 손상과 뇌혈류 감소 등이 관찰된다. 원인 모를 뇌 속 변화가 기면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외부적인 뇌손상에 의한 기면증도 있다.
반면 나타나는 증상은 꽤 분명하다. 몇 가지 설문만 해보면 기면증인지, 단순 수면부족인 지 금방 구분할 수 있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졸음에 빠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중요한 회의나 시험시간, 운전, 대화, 식사 중에도 잠을 잔다. 위험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작업 중 잠에 빠지는 경우도 기면증일 가능성이 높다. 기면증 환자의 70%에서 동반되는 '탈력발작'도 뚜렷한 특징이다. 크게 웃는 등 감정이 변할 때 양 다리에 힘이 빠지며 주저앉는 식이다.
◆수면검사 등으로 진단, 평생 치료해야
기면증 환자의 특징 중 하나는 낮에 불을 끄고 누우면 거의 '즉각' 잠에 든다는 것이다. 이는 기면증 검사의 한 기준이기도 한데 정상은 8분이다. 앞서 9세 여자 어린이의 경우 36초, 43세 남자는 2분 10초만에 잠에 빠졌다.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것도 기면증의 독특한 증상이다. 그 외 뇌척수액에서 히포크레틴 농도를 측정하는 식의 검사를 통해 기면증 진단을 내린다.
기면증으로 밝혀지면 행동치료와 약물치료 두 가지가 병행된다. 행동치료는 충분한 밤잠(8∼9시간)을 유지토록 하고 규칙적인 수면 생활을 지키게 한다. 하루 2∼3회 낮잠을 15∼20분 자도록 하며 되도록 많이 움직이는 직업을 갖도록 유도한다. 졸음이 '게으름'이 아니란 것을 가족과 동료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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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암페타민과 같은 마약성 약물이 유일한 치료제였으나 최근엔 비마약성 약물인 모다피닐이 소개돼 의존성 문제가 해결됐다. 윤창호 인하의대 신경과 교수(인하대병원)는 "모다피닐은 기존 치료제의 문제를 해결한 중요한 약물이지만 평생 먹어야 한다는 점과 임신 중에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고 말했다. 탈력발작을 동반한 경우 모다피닐과 우울증약을 동시에 먹어야 한다.
치료에 장애물로는 건강보험 문제가 꼽힌다. 모다피닐은 보험급여가 적용돼 환자 부담이 적은 편이지만, 기면증 진단을 위한 검사는 비급여로 100만원이 넘는다. 경제적 부담과 질병에 대한 낮은 인지도가 합쳐져 국내 기면증 환자의 90%는 적절한 의료적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홍 교수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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