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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브로커와 로비스트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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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단 계보도(系譜圖)'라는 용어가 있다. 예전에 고정간첩이 잡히면 누구누구를 어떻게 포섭해서 활용하고 핵심 인사에게 접근하기 위한 통로로 이용했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도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일반 대형 수뢰사건에서도 언론이 비슷한 관계도를 그려 보도하면서 생겨난 용어다. 수사선상에 오른 수많은 관계자의 학연, 지연, 혈연, 직장 관계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간첩단 계보도'가 최근 부산저축은행 파산사건 이후 또다시 등장했다.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저명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면서 학맥과 인맥으로 복잡하게 얽힌 '계보도'가 다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계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우선 계보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이들의 역할, 중요도가 뇌물전달 창구 역할을 맡은 '브로커'들의 입에 의해 상당 부분 좌우된다는 것이다. 문제의 브로커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해서는 입을 닫거나 역할을 가볍게 해주고 자신에게 서운하게 한 사람에 대해서는 관련성을 과장하거나 위증한다 하더라도 검찰이나 언론이 이를 확인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심지어 자신이 전달하기로 한 돈을 다른 데로 빼돌리는 배달사고를 내고서도 당사자에게 전달했다고 우기면 그걸로 끝이다. 뇌물사건의 특성상 돈을 전달했다는 '정황'만 있을 뿐 실제로 돈이 오갔는지 '사실입증'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계보도'에 수뢰사건으로 이름이 오른 당사자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사회적 죽음'을 맞게 된다. 브로커의 증언 때문에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후 구속기소돼 곤욕을 치른 사람 가운데 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난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이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아도 그 사건은 이미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언론이 이들의 무죄를 재조명해주는 일은 거의 없다. '계보도'에 이름이 오른 그 순간 '브로커의 입' 하나 때문에 이들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브로커들의 공통점은 불법적 로비의 시장수요의 특징을 잘 파악하며 겉으로는 그럴듯한 직함과 명함을 가지고 있고 인맥과 학맥을 잘 연결해 불법자금 전달 창구 역할을 자임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로비를 합법화할 수 있는 법이 없고 로비스트라는 합법적인 직업도 없기 때문에 브로커는 그 자체로 불법일 수밖에 없다. 로비를 원하는 '시장수요'는 엄존하는데도 로비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니까 당연히 음습한 로비의 암시장이 발생하고 불법 브로커만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언제까지나 이 같은 불법 브로커가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차제에 미국처럼 로비를 합법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론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합법적 로비스트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직업윤리를 갖춘 사람이다. 로비의 내용도 공론의 장에 오르게 돼 일반 사람들이 쟁점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로비스트 등록을 받을 때 자격기준을 까다롭게 해서 자신의 평판을 중요시할 만한 사람으로 제한하는 것도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로비스트가 합법화되더라도 불법 브로커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부작용을 현저히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불법 브로커의 입 하나 때문에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보도'에 이름을 올려 고통을 겪고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아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회적 죽음'에 이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죄를 엄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도 문명화된 사회와 법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실버산업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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