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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죠>│이나중 탁구부부터 이말년까지, <내일의 죠>의 흔적들

최종수정 2011.06.22 14:07 기사입력 2011.06.22 14:07

강력한 장면이란 그것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인상을 남기는 법이다. 1968년부터 10여 년간 연재된 만화나 1980년부터 만들어져 1993년 MBC를 통해 방송된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내일의 죠>는 강력한 작품이다. 누구나 야부키 죠의 차림새를 기억하고, 그의 명대사를 말할 수 있으며, 작품에서 그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고 인용하는 레퍼런스 속에는 처절하게 살아 온 한 남자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인생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렬한 것이었다. 누구나 알지만 대부분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강렬한 남자, 도전자 허리케인 죠의 흔적을 정리했다. 20권을 꽉 채운 만화를 독파하지 않아도 앞으로는 죠가 무엇을 왜 하얗게 불태웠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링 위의 김무스, 허리케인의 헤어스타일
MBC에서 방영된 <도전자 허리케인>에서 김종서는 노래했다. 이름도 묻지 마라, 고향도 묻지 마라.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야부키 죠의 헤어스타일은 왜 그렇게 생겼느냐고. 링에 오르지 않을 때는 대부분 빵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는 죠의 앞머리는 앞으로 삐죽하게 솟아 나온 형상이다. 단페이를 처음 만나던 시절에는 가난한 형편에 이발소에 갈 돈이 없어 아무렇게나 방치한 머리 모양이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소년원에 드나들거나 죽을 각오를 다지며 자신을 단련할 때조차 죠는 그 흔한 삭발 한번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링 위의 김무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죠의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에서도 나름의 이유는 짐작된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오직 자신의 승부욕에만 집중하게 되는 죠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파이터다. 링 위에서 그가 영혼의 힘에 기대어 주먹을 휘두를 때, 앞머리가 만드는 그늘은 종종 그의 표정을 숨긴다. 고통스러운 얼굴조차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죠의 숙명이 그의 앞머리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죠의 스타일 철학은 <렛츠고 이나중 탁구부>의 이자와 히로미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하루에 초강력 스프레이 2통을 써야 유지된다는 문제의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이자와에게 아부키 죠는 본받아야 할 남자의 표본이다. 그러나 이자와는 짝사랑하던 리에꼬 선배가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놀리자 목숨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앞머리 단발식을 거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이자와의 앞머리를 잘라낸 사람이 다름 아닌 치요꼬이며, 이후 치요꼬는 이자와의 여자친구가 된다는 점이다. 허리케인 죠의 스타일이 사라지는 순간, 고독한 남자로서의 운명 또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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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로망, 크로스 카운터
소년원에서 리키이시와 처음으로 정식 복싱 대결을 하게 된 야부키 죠는 당연하게도 수세에 몰린다. 그러나 단페이로부터 전수 받은 ‘내일을 위한 그 세 번째’ 필살의 펀치를 위해 죠는 다운 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투지를 보인다. 가드를 올리기는커녕 정면으로 얼굴을 가져다 댄 죠는 리키이시의 마지막 일격에 맞춰 회심의 펀치를 날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가격 한 채 함께 넉다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카운터로, 상대방이 치고 들어오는 힘을 맞받아치는 동시에 상대의 팔과 교차된 팔의 힘을 이용해 펀치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기술이다. 이후 죠는 크로스카운터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활용하며, 호세 멘도사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그는 트리플 크로스카운터로 상대방을 다운시킨다.

홀로, 주먹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복싱에서 크로스카운터는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호전적이며 화려한 기술에 속한다. 방어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아 상대방에게 더 큰 타격을 주어야 하는 이 기술은 그래서 최후의 일격, 사생결단의 장면에 꾸준히 응용된다. 가장 마지막의 승부수를 던지 듯 주먹을 맞고, 던진 후의 고요함은 이제 타격 액션의 주요 클리셰가 되었을 정도다. 심지어 이 크로스카운터 시퀀스는 레이저와 미사일을 사용할 것처럼 생긴 로봇들에게도 해당된다. 로봇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 3화에서 합체까지 한 로봇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크로스카운터를 나누는 장면은 누가 보더라도 <내일의 죠>에 대한 오마주다. 로봇도 사나이라면, 포기 할 수 없는 로망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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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불태웠어”
마지막 경기, 호세 멘도사의 스크루펀치에 연타 당한 야부키 죠는 이미 체력이 고갈 된 상태다. 심지어 펀치드렁크 상태에 빠진 그는 한쪽 시력이 급속히 저하되는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죠는 기권 할 것을 요구하는 단페이를 “기다려줘 영감. 난 아직 새하얗게 되질 못했어”라는 말로 설득한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에게 권투를 그만두라고 했던 노리꼬에게 들려 준 대답을 회상한다. “어정쩡하게 불완전연소 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진 않아. 아주 짧은 순간일지언정 눈부실 정도로 붉게 달아오르는 거야. 그리고 그 후엔 새하얀 재만 남는 거지. 오로지 재만 남는 거야. 타다가 마는 일은 없어.” 그리고 죠는 끝내 자신의 몸을 걱정해주는 단페이의 마음을 외면한다. “부탁이야 영감. 새하얀 재가 될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둬. 아무 말도 하지마.” 일명 ‘완전연소’라 일컬어지는 이 대목은 사실상 <내일의 죠>의 세계관을 압축한 장면이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한 순간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결전에 임하는 자세는 사나이의 의지를 극명하게 미화한다.

이후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문구는 ‘최선을 다 했다’는 뜻으로 통용되며 수없이 패러디 되었으나, 원작의 비장함이 그대로 전이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내일의 죠>가 배경으로 하는 패전 이후 일본에 현재의 세대가 완전히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균형이다. 죠는 단지 가난하고 외로운 개인이 아니다. <내일의 죠>의 첫 문장이 ‘동양의 대도시라 불리우는 거대도시 도쿄’라는 점은 이를 뒷받침 한다. 죠는 도쿄의 화려한 발전에 가려진 하층민을 대변하며 대도시의 장벽을 돌파하는 무산자의 저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작품은 패전과 가난으로 무력감에 빠진 이들에게 모든 것을 불태우는 투지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의 독자들은 재만 남는 도전의 무의미함을 안다. 그들은 뜨겁게 살아남아 따뜻한 보상을 받기를 원한다. 자신을 불살라 희망이 된 죠의 세대는 오래 전에 멸종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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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아이콘, 엔딩의 정석
결국 야부키 죠는 호세를 KO시키지 못한다. 올라운드 경기를 뛰고 판정패 당한 죠는 코너의 작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떨구는데, 원작 만화에서 이 장면은 명확하지 않게 그려진다. 상대방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부터 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단페이의 표정을 통해 죠가 그야말로 완전 연소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게다가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미소를 띤 채 굳어버린 죠의 모습만이 그려져 있을 뿐 어떤 대사도 없다.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대사와 마찬가지로 이 장면 역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서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패러디 된다. 누구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떨구고 미소를 띈 흑백의 모습이라면 ‘상황의 종료’를 의미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장면은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이 장면에 오버랩 되는 ‘불태웠어... 하얗게’라는 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엔딩으로. 데자키 오사무 감독은 이 대목에서 죠의 모습을 흑백으로 처리하며 그가 죽음에 이르렀음을 보다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어두운 링 위에 오직 죠의 어깨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게 함으로써 암흑에 가까운 그의 인생에서 바로 그 순간이 절정임을 은유한다. 그래서 어쩌면, 죠의 생존 여부는 <내일의 죠>에서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마지막 결전에서 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며 이로써 그의 권투 인생이 마무리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과업의 완결로서 뭉클한 동시에 대가 없는 질주인 까닭에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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