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호 의원과 조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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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원의 여의도프리즘]# 80년 광주항쟁이 미국의 방조와 전두환 군사반란 집단에 의해 짓밟힌 후. 좌절한 일부 운동권은 한국전쟁 이후 금기시 된 급진사상을 조직의 지도이념으로 수용하게 된다.


‘남한의 기본 모순은 바로 미제국주의’라고 규정한 NL(민족해방)그룹 중 일각은 아예 북한의 주체사상까지 흡수하는데, 당시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운동권 내 주체사상은 광주항쟁(학살)이 낳은 정치적 사생아”라고 진단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전국을 뒤흔들던 1987년 6월, ‘제헌의회 소집하자’는 혁명적 구호를 내걸었던 CA(제헌의회)세력도 논쟁적 분파가운데 하나였다.


‘독점자본이 우리사회의 주요 모순’이라고 주장했던 CA의 정치적 침전물 중 하나가 바로 ‘사노맹’(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라는 조직이다.

CA 좌파가 PD(민중민주)그룹으로 발전하고 이 중 일부가 사노맹을 결성했는데,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사노맹에 대해 “6ㆍ25 이후 남한에서 만들어진 최대의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 조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표한 박노해와 서울대 총학생장 출신인 백태웅 등이 주도하던 사노맹은 이들이 차례로 구속되면서 와해된다.


백태웅은 이후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치고 현재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법대교수로 있고, 박노해는 지금 이 시간도 제3세계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있다.


# 사노맹은 재판도 정치투쟁의 일환으로 봤다. 사법부를 민주국가를 떠받치는 3권분립의 한 요소가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의 주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재판 자체에 대한 거부는 물론 재판정에서의 구호와 소란, 일부 방청객의 호응 등으로 번번이 아비규환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이었던 유선호는 “재판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차분히 설명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논리로 그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조직원 중 한 명이었던 조국에게는 “조직 내에서의 위치와 활동을 고려할 때 재판만 차분히 받으면 집행유예로 석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조국은 유선호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른바 재판투쟁을 이어갔으며 결국 감옥살이를 택했다.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민변은 특히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이런 저런 이유로 소외된 사람들의 몇 안되는 벗이었다.


변호사들이 가급적 꺼리던 시국사건, 그 중에서도 극좌파인 사노맹 사건을 말없이 떠맡았던 유선호 류의 양심적 법률가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삭막했을 것이다.


‘남한 노동자의 힘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자’고 외치던 조국은 현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유선호와 같은 체제 내부의 사려 깊은 기성세대가 없었던들, 조 교수가 오늘 날 ‘강남좌파’라는 담론까지 이끌어낸 범 진보세력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성장했을지도 의문이다.


# 4월 재보선에 가려 관심권 밖으로 멀어졌으나, 민주당은 5월초 내년 총선과 대선을 이끌어갈 새 원내대표를 선출한다.


강봉균, 김진표 등 당내 대표적 정책통들과 치열한 물밑경쟁을 벌이고 있는 유선호는 “민주화 주도세력이라는 당의 정체성을 강화시켜야 정권교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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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대표 한사람의 개인기 보다는 소속 의원들의 다양한 활동을 널리 알리는 네트워크 리더쉽도 강조하고 있다.


특유의 ‘허허실실’ 전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해 온 유선호가 ‘확실하게 밀어주는 계보가 없다’는 일각의 우려를 극복하고 이번에도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광남일보 국장 dw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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