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내게 외국기업의 '무지'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선진적일 것이라 생각해온 외국기업들에 대한 '역발상'이 가능하게 됐다고 할까. 전혀 다른 개념을 억지주장하거나 겨우 인정하는 모습이라니.
식욕마저 잃었지만 CEO가 맡긴 임무로 인해 현지에서 기다리던 싱가포르 세일즈 엔지니어 친구들을 만났을 때에도 피로를 숨기고 환한 미소로 응대했다. 그러나 같이 협상작전을 짜는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시작됐다.
'책임제한(Limitation of liability)' 때문이었다. 책임제한이란 구매자에게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판매자의 책임을 일정부분만 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바이어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사실 심플했다. 자격이 있든 없든 상사들의 의견을 존중해 넌센스하게도 책임제한 문구를 포함시켜 들이밀었다. 더욱이 그 속에는 불법행위(tort liability)까지 책임제한에 포함되도록 했다.
우리가 판매하려한 기기는 매우 특수한 것이었다. 따라서 특정 가동시간동안 일정한 작동을 하지 않으면 바로 상대방에게 손해가 발생한다. 이것이 그 이름도 유명한 '결과적 손해(consequential damages)'라는 것이다. 결과적 손해의 반대말은 부대적 발생 손해(incidental damages)다. 부대적 발생 손해는 대체물의 비용(cost of cover)과 그 부대 비용이다. 이에비해 결과적 손해는 약간 성질이 다르다.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바이어가 판매자의 불이행으로 인해 입은 손해를 일정정도 보상해 주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기대 이익의 상실(loss of profit)이라고 할까…. 그러나 결과적 손해를 무한정으로 확대할 수 없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foreseeable)이나 직접 손해(direct cause) 등으로 재단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외국계 회사에서는 이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사실 25년 경리담당 출신인 '무늬만 변호사'는 그렇다 치자. 그를 지휘하는 변호사를 거친 결과가 불법행위까지 책임제한에 넣으려는 지침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계 법률 담당자를 믿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 존경할 만한 중국계 변호사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어설픈 법률 전문가'들은 불법행위 책임이 계약 책임(contract claim)과 전혀 종류가 다르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불법책임(Tort claim)과 계약 책임(contract claim)이 두 개의 다른 클레임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CEO의 설명은 충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 본사에 근무하는 '법률 전문가'는 자기의 주장만 되풀이할 뿐 알아듣지를 못했다. 결국 회사 모두가 공감한 후 본사의 승인을 얻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데까지 달했다. 법률책임자를 엄마처럼 따른 CEO가 내가 제기한 의견을 수용해준 것, 그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물론 '후환'은 있었지만.
힐러리 앤드 톰슨 파트너스 대표(hjthomp@hotmail.com)
*김희정 씨는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인턴생활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굴지의 L그룹에 이어 외국계 기업의 법률 전문가로 활동해오다 '힐러리 앤트 톰슨 파트너스'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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