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여년 간 이라크 현지 은행들이 이란에 수백억달러를 불법 송금한 정황이 포착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현지에 구축한 임시 금융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금융 감사·자문 회사 K2 인테그리티의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 금융 기업가 알리 굴람이 보유한 이라크 중동 투자 은행, 알 안사리 이슬람 은행, 알 카비드 이슬람 은행 등 세 곳은 2022년 미 재무부에 의해 달러 거래 금지 처분을 받기 전까지 10여년간 해외로 불법 송금을 해왔다.
이들 은행은 미 당국의 처분 전 6개월 동안은 총 35억달러(약 4조7000억원)를 해외로 송금했으며, 자금의 대부분이 정체가 불분명한 아랍에미리트(UAE)의 회사 몇 곳으로 보내진 것으로 확인됐다. 또 어떤 날에는 2억5000만달러가 넘는 돈이 송금됐는데 이 중 80%가 추적이 불가능했고, 금액 중 일부는 이란 혁명 수비대와 그들이 지원하는 반미 민병대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보고서는 해당 자금에 관한 송장 정보가 제한돼 있고 지나치게 단순했다며 '돈세탁의 위험 신호'라고 덧붙였다. 다만 굴람은 WSJ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자금세탁이나 이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관련 혐의를 부인한 상태다.
이러한 자금 송금은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구축한 임시 금융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 판매 수익을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보관하고, 이를 다시 이라크로 보내 현지 민간 은행들이 상업용 송금 업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다만 해당 임시 시스템에서는 이라크 송금 자금의 해외 수신인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공개할 필요가 없어 감시 기능이 미비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미 당국자들은 굴람의 은행들을 포함한 이라크 은행 20여 곳이 위조 송장 등을 이용해 이란과 그 대리 세력에 달러를 수혈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미 재무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1월 바그다드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이라크 당국자들에게 현지 은행들이 미국 달러에 대한 접근권을 고의로 악용해 이란혁명수비대(IRGC)의 준군사조직인 쿠드스군과 이라크 민병대를 지원한 점을 지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에 자금이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브라이언 넬슨 전 재무부 테러·금융정보 담당 차관은 "미국은 의심스러운 이라크 은행들이 연방준비제도(Fed) 시스템을 이용해 달러를 이체하는 것에 대해 조처했다"며 "자금이 이란 정권 지원에 유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재무부의 주요 임무"라고 설명했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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