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 치명적인 향기…‘풀멍’의 유혹을 좇다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식물분류학자 허태임 박사가 풀과 나무를 따라가며 얻은 기록들을 엮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사라져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는 저자는 ‘제대로 지키려면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국의 산과 들과 강을 누비며 식물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사람의 언어로 옮기고 있다. 비무장지대나 국가보안지역, 무인도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숲을 헤매고 암벽과 고목을 올라 우리 땅 식물들의 놀랍고 절박한 이야기를 전한다. “지구라는 별에서 자신의 서식지를 지키는 일에 가장 서툰 생물은 아마도 인간”일 거라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숲의 경고’도 잊지 않는다.
하늘타리는 낮에는 꽃잎을 웅크려 쪼그라든 채 밤을 위해 에너지를 아꼈다가 밤이 되면 꽃잎을 한껏 펼치고 솨솨 소리를 낼 듯이 짙은 농도로 향기를 발산한다. 꽃가루받이의 매개자가 될 밤의 곤충들을 유혹하려고 어두운 숲에 자신의 향기를 부려놓는다. 너무 고혹적이고 관능적이고 농염해서, 그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허겁지겁 조사를 서둘렀던 기억이 여태껏 남아 있다. 포유류인 내가 그 꽃부리에 코를 묻고 있다가 한 점의 꽃가루로 변신해서 암술대를 타고 씨방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밑씨를 만나, 마침내 ‘수정’이라는 행위에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던 한여름 밤의 기억! 그 치명적인 향기를 하늘타리는 요술처럼 맨몸으로 만든다. <53~54쪽>
결과들을 분석해서 종과 종 사이의 거리를 재단하는 일이 식물분류학자의 업이라지만, 자연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와 현상들을 구명하는 일이 가당하기나 한 것인지 때로는 회의와 절망의 감정들이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 일에서 잠시 벗어나 식물 본연의 모습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낙지의 다리처럼 생긴 낙지다리와 소의 무릎을 닮은 쇠무릎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사랑하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동력을 얻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식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풀멍’이라고 해야 할까. <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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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 허태임 지음 | 김영사 | 292쪽 | 1만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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