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이종길의 영화읽기]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속에서 나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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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코(후루카와 고토네)는 피팅 모델이다. 친구 츠구미(현리)가 분장을 도와준다. 촬영을 마치고 둘은 함께 택시를 탄다. 집으로 가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츠구미가 새로운 연애담을 털어놓는다. "뭐랄까, 여자에게 익숙한 느낌? 나쁜 의미로 말고. 어디서 느꼈냐면, 아오야마에 오피스 겸 집이 있대. 선수 같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직업은 뭐야?"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대표인데 투자도 해." 메이코는 순간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워한다. 비밀이 들통난 사람처럼 과장된 웃음을 연발한다. "그건 좀 선수 같네."


영화 ‘우연과 상상’은 제목처럼 우연한 순간에 이뤄지는 상상을 다룬 단편 모음집이다.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메이코는 츠구미로부터 전 남자친구 가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의 근황을 전해 듣는다. 자기를 한동안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쩔 줄 모르며 초조해한다. 츠구미는 눈치채지 못한다. 첫 만남이 ‘마법’ 같았다며 몸까지 허락하고 싶었다고 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몇 번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을 경험한다. 뜻밖의 일은 설레고 황홀하다. 메이코도 다르지 않다. 가즈아키가 자기를 한동안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떨리고 행복해한다. 우연은 짧은 시간만을 허락한다. 그걸 계기로 다시 만남을 이어간다면 더는 우연이 아니다. 인연이다. 메이코는 곧장 가즈아키를 찾아간다. 인연으로 만들고자 그를 계속 자극한다. "가즈는 너무 다정해. 그래서 나랑 안 맞아. 츠구미랑은 멋진 커플인데." "맞아." "가즈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걸 믿어볼 생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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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코가 가즈아키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 ‘아사코(2018)’에서 비슷한 배역을 다룬 적이 있다. 주인공 아사코(가라타 에리카)가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다. 탐색할 시간도 없이 키스를 해오고 사랑을 시작한다. 이어지는 행위도 비현실적이다. 둘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왜 사고가 일어났는지, 얼마나 다쳤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바닥에 쓰러져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모습만 조명된다. 운명론적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교통사고는 불가항력적이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원인이나 근인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바쿠는 신발을 사러 갔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상처를 받은 아사코는 2년 뒤 바쿠를 빼닮은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만난다. 둘은 연인이 되고 새 보금자리를 구해 행복한 신혼을 준비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환송하는 자리에 모델로 성공한 바쿠가 불쑥 나타나 손을 내민다. "역시 기다렸구나." "왜? 지금이야?" "아사코에게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시기의 의미를 묻는데 행위의 이유를 이야기하니 동문서답이다.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반문으로 해석된다. 여전히 아사코가 운명 속으로 뛰어들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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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의 손에 이끌려 센다이로 향하는 아사코는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는 꿈을 꿈으로 규정한 뒤에야 마음을 고쳐먹는다. 경계선을 다시 넘는 모습은 클로즈업 샷으로 나타난다. 배경에는 바다가 있다. 하마구치 감독은 비슷한 크기의 샷을 초반에도 보여준다. 고초 시게오 사진전에서 쌍둥이 자매를 찍은 작품을 바라보는 얼굴이다. 아사코의 시선은 그렇게 모호한 인위적 이미지에서 단일화된 자연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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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코가 우연을 마주하는 자세도 흡사하다.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재결합까지 상상하나 외부 요인으로 현실을 인지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간다. 스크린에서 튀어나올 듯 정면을 향해 달리고는 육교 위에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는 더 이상 인위적 조건에서 찍히는 피사체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진으로 담아내는 능동적 주체다. 동요 없이 모든 인연이 다시 찰나의 우연처럼 아득한 추억으로 바뀌길 기대할 것이다. 아사코처럼.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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