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앞선 지성인…마지막 순간에도 펜을 잡았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암 수술 후 집필 중 26일 별세
‘우상의 파괴’로 화려한 데뷔, 88올림픽 개회식 굴렁쇠 소년 연출
장관 시절 국립국어원 설립…‘언어 순화 기준 제시’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서믿음 기자] “나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다. 목수는 집을 짓는 사람이지, 새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아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2017년 두 차례 암 수술 후 항암치료 대신 마지막 저서 집필에 몰두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목수를 자처했던 고인의 삶은 등장부터 강렬했다. 1955년 서울대 국문과 2학년 때 기성 문단의 거두들을 향한 통렬한 비판을 담은 글 ‘우상의 파괴’가 당시 4면 신문 한 면에 통째로 실리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낡은 인습과 우상의 벽을 깨부수고 젊은 세대의 창조의식을 일깨운 그의 선언에 청춘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로 시작하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30대의 이어령이 정의한 한국 문화가 담겨있다. 한복, 서낭당, 고려청자 등 우리 전통의 소재와 건축에서 독창적 메시지를 풀어낸 그는 무조건적 찬양이 아닌 비판을 통한 지향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초 제목으로 낙점된 ‘한국의 문화풍토’를 고인은 직접 ‘풍(風)’을 우리말 바람으로, ‘토(土)’를 흙으로 바꿔 세련된 울림 또한 선사했다.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한 고인은 19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식전 상임위원으로 참여해 개회식 마지막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를 기획하며 원고지 대신 운동장에 구현한 여백의 미학을 세계인 앞에 펼쳐보였다.
1990년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되면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이 된 고인은 국립국어원을 설립해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했다. 모국어로 사유하고 창조하기를 즐겼던 그는 장관시절 일본식 한자어인 노견(路肩·길어깨)을 우리말 갓길로 고친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성과라고 자평했다. 또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세워 문화 영재 양성의 기반도 마련했다.
정보화 사회를 일찍이 예견한 그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표어와 함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 개념인 ‘디지로그’를 제시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 현실과 접목해야 힘이 생기며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메타버스의 출현에 대한 앞선 통찰이었다.
고인은 60여 년 동안 약 130 종의 저서를 출간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지성의 오솔길' 등과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 '젊음의 탄생' 등이 있다.
2012년 맏딸 이민아 목사를 암으로 먼저 보낸 고인은 이를 계기로 기독교에 귀의해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靈性)”이라고 했다. 투병 중 출간한 책 ‘메멘토 모리’에서 신의 존재 증명에 관한 근원적 질문에 고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하는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라며 “그것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고 남녀의 사랑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뤄진 신앙의 세계”라고 설명했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여러 영역을 넘나든 그의 저술활동을 두고 한 영역만 지긋이 파고들었다면 세계적 석학이 됐을 것이란 지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에 그는 “우물을 파는 사람이 있고 우물물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내 평생 살아온 것은 우물 파는 역할이고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으면 다른 데 가서 또 우물을 파는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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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파고 집 짓는 목수를 자처했던 그는 완성된 우물과 집을 두고 홀연히 떠났다. 고인은 “기둥을 다 세워놓고 나는 떠난다. 그때 정말 이 집 주인이 올 것이다”라며 자신의 말과 글을 마지막 선물로 남겼다.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면서….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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