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딸깍발이] 리센코의 망령 서평
후생유전 주장한 농생물학자 리센코
이론 발전보다는 반대파 숙청에 골몰
그나마 진행했던 실험들도 수준미달

밀을 살피고 있는 리센코<사진제공:동아시아>

밀을 살피고 있는 리센코<사진제공: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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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이 결핍하면 자손들이 건강상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스웨덴 북쪽 외버칼릭스라는 지역에서 실제 있었던 사례를 연구한 결과다. 이곳은 19세기 초부터 주기적으로 식량난과 풍년을 번갈아가며 겪었는데 흥미로운 건 기근을 겪은 이의 자녀가 도시로 떠난 후 넉넉하게 영양분을 섭취한 상태에서 그들의 아이가 건강상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도시로 이주한 자나 그 자녀는 영양이 결핍된 적이 없는데도 궁핍했던 조부모를 한 세대 건너뛰어 손자·손녀에게서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사춘기 직전 풍족한 시절을 겪은 대식가 남성의 손자가 일찍 죽는 경향이 있다거나 임신 당시 배고픔에 시달린 여성의 손녀가 일찍 사망하는 사례도 연구로 입증됐다. 유전학 연구진 사이에선 이러한 식량수급이 미래 세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지역 이름을 따 외버칼릭스학이라 부른다. 스톡홀름의 명문 의과대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라스 비그렌은 당사자들의 방대한 건강정보를 연구한 이 결과를 1980년대 논문으로 내놓으려 했으나 실제 출간되지는 못했다. 연구방식이나 통계 탓이 아니었다. 이러한 결론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근현대 이후 서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공고히 한 ‘전통’ 유전학에 따르면 이러한 획득 형질, 즉 후천적인 외부 영향에 따른 특성은 유전되지 않는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를 진화론으로 설명할 때,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따먹으려고 늘리려다 보니 다음 세대로 넘어갈수록 조금씩 길어져 지금과 같은 길이가 됐다고 보는 게 획득형질에 따른 논리다. 이는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론에 밀려났다.


원래는 목이 짧았으나 일부 목이 긴 변이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타났고, 이러한 변이 개체가 생존에 유리해져 그 과정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목이 긴 기린만 자연에 의해 선택됐다는 얘기다. 정설은 후자다. 그런데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바뀌었다. 후성 유전도 가능하다고 학문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토마스 쿤의 표현대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 그 전에 과학계에 남긴 상처가 큰 게 문제다. 상처를 낸 이는 트로핌 리센코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활동한 농생물학자 리센코는 획득 형질의 편에 섰다. 단순히 학자로서 자신의 이론을 갈고 닦아 실제 연구에 적용하는 흔한 과학도는 아니었다. 서방 중심의 세계관에서 보자면, 옳은 연구를 하는 과학자를 자기와 대척점에 있다고 제거하며 소련의 유전학을 퇴보시킨 인물이다. 이론 자체가 허접했던 데다 주변 과학자를 숙청하는 데 앞장 섰다는 인상이 덧씌워져 일찌감치 그의 이론은 소련 내에서도 묻혔는데, 최근 후성유전학의 부상과 함께 리센코가 재조명받고 있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리센코의 망령'<사진제공:동아시아>

최근 국내에 출간된 '리센코의 망령'<사진제공: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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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그레이엄, 리센코 성급함 이면엔
소련의 성과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
그 악명탓에 현재도 러시아선 연구막혀

최근 국내에 출간된 ‘리센코의 망령’은 과연 이러한 신드롬이 적절한지를 묻는다. 책을 쓴 로렌 그레이엄 명예교수는 MIT·하버드 등에서 과학사, 그 중에서도 소련과 러시아를 무대로 한 과학의 역사에 천착했다. 리센코를 축으로 그의 전후를 살았던 다양한 과학자(혹은 유사과학자)의 논문과 공식 견해를 비롯해 저서, 신문기사, 연설문 등을 샅샅이 훑었다. 수많은 인물과 이곳저곳에 흩어진 파편을 하나로 긁어모아 생물학 혹은 과학에 관심이 없을 법한 독자라도 솔깃할 만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등장인물이 많은 탓에 이야기에 빠져들긴 어렵지만 대강의 구도를 그려 페이지를 넘긴다면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다.


저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리센코를 과학자로 보긴 힘들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겨울밀 실험이다. 근대 이후 과학에서 당연시되는 다양한 실험방식을 거부한 채 본인만의 좁은 세계관 속에서 실험을 해나갔는데, 그는 밀의 겨울 품종을 봄 품종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근거로 든 게 겨우 두 포기로 한 실험이었다. 그중에 하나는 해충에 의해 죽고 하나만 춘화처리(식물을 저온에 노출시켜 개화를 촉진하는 과정)로 이삭을 팼다. 그러면서 이를 근거로 춘화처리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저자는 리센코가 이처럼 성급히 연구성과를 내려고 한 이유를 단정 짓지는 않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직간접적인 압박 때문일 거라고 추정한다. 저자는 "신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한 소련 정부의 압력 아래에서 리센코는 언제나 조급했다"며 "이러한 조급함 때문에 그는 더 빠른 지름길을 선호했다"고 했다. 소련은 조급했다. 서방에 견줘 체제의 우월성을 내세워야 하는데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농업분야에서 성과를 내야 했다. 엄밀한 연구절차를 거치기보다는 당장에 써먹을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는 게 더 중요했다는 얘기다.


트로핌 리센코<사진제공:동아시아>

트로핌 리센코<사진제공: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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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러한 획득 형질 이론이 정치와 만났을 때다. 인위적으로 우성 형질을 열성으로, 열성을 우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리센코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나치 독일의 우생학이나 인종주의 역시 비슷한 사고방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마냥 허무맹량한 얘기로 볼 수도 없다. 앞서 언급한 외버칼릭스의 초기 연구를 두려워한 것도 그래서다.


2000년대 이후 후생유전학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과거와 달리 획득 형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나 리센코가 옳았는지에 대해 저자는 아니라고 확실히 단언한다. 연구의 내용을 떠나 수행방식 자체가 틀렸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을 ‘과학적 사실’로 유지시키기 위해 반론을 원천적으로 제거한 게 옳지 않다고 봤다. 저자는 책 말미에 리센코를 두고 "폭압적인 국가 덕분에 자신의 견해를 타인에게 정치적으로 강요할 수 있었던 무능한 과학자"라고 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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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코가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후생유전학을 연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러시아 과학계의 현실은 그 자체로 리센코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숙이 새겨져 후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획득 형질의 사례로 비춰진다. 결국 질문은 리센코가 옳았는지, 틀렸는지가 아니라 과학과 정치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둘을 서로 구분해서 보는 게 옳은 일인지일 테다. 답은 쉽지 않다. 다만 성급히 결론 짓는 태도는 항상 틀렸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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