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가을귀]당신은 이 잉크 얼룩이 뭐로 보이나요
데이미언 설스 '로르샤흐: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
100년 전에 만들어 지금도 사용하는 심리테스트용 10장의 잉크 얼룩 카드
후속 연구 마무리 못하고 37세에 세상 떠난 로르샤흐의 전기
헤르만 로르샤흐가 만든 잉크 얼룩 카드 3번. 추상적인 무늬의 잉크 문양을 떠오르는 대로 해석하다 보면 피검사자의 성격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대다수는 정장용 예식 모자를 쓴 남자 두 명이 서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답한다고.
1986년 봄, 로즈 마르텔리라는 여성이 도널드 벨이라는 남성과 이혼했다. 마르텔리는 임신 상태였다. 아들이 태어나자 벨은 친권ㆍ면접권 소송을 제기했다. 마르텔리는 벨이 결혼 기간 폭력을 행사했다고 맞섰다. 그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8살 딸도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판사는 혐의 제기 시점이 의심스럽다고 봤다. 벨에게 친권과 면접권이 있다고 판결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멍이 들어 있었다. 마르텔리는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동보호국은 마르텔리와 벨에게 심리평가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검사 결과 벨은 정상으로 나왔다. 반면 마르텔리는 심각한 정서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동보호국은 마르텔리에게 소송 취하와 치료를 권했다. 훗날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때리고 엉덩이도 찌른다고 호소했다. 성폭행 검사용 면봉 반응은 양성. 뒤늦게 진행된 아동학대 심리 조사에서도 마르텔리와 딸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수없이 확인됐다.
아동보호국이 오판한 건 심리학자의 첫 보고서를 맹신했기 때문이다. 다른 심리학자는 한 가지 검사로 마르텔리에게 정서장애가 있다고 규정한 것에 충격받았다. 그 테스트가 바로 로르샤흐 검사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헤르만 로르샤흐(1884~1922)가 고안한 로르샤흐 검사는 잉크 얼룩으로 성격을 진단하는 프로그램이다. 판단은 개인의 지각이 성격과 연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내적 충동, 동기, 충동 통제 같은 성격의 다양한 측면이 비구조화한 잉크 얼룩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표출된다는 논리다.
이를 유도하는 잉크 얼룩 카드 열 장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된다. 존 E. 엑스너 2세의 '로르샤흐 종합체계', 그레고리 J. 마이어의 '로르샤흐 수행 평가 체계' 등 새로운 해석 체계가 계속 연구ㆍ개발된다.
검증된 검사는 왜 마르텔리와 벨의 심리를 꿰뚫어보지 못했을까. 이들은 엑스너가 개발한 로르샤흐 해석 보조 프로그램으로 검사를 받았다. 검사자가 환자의 모든 응답에 기호를 매기면 프로그램이 이를 계산해 복잡한 (엑스너) 점수를 산출하고 통계적 규준에서 유의미하게 벗어난 편차를 표시한다. 해석적 가설을 산문 형식으로 출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은 자기가 남들보다 못났다고 여겨 낮은 자존감과 자기 확신 부족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인다"는 식이다.
그런데 당시 엑스너 점수는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상 수검사를 비정상으로 보거나 긍정적 결과를 무시하는 오류가 부지기수로 나왔다. 마르텔리에 대한 검사에서는 잉크 얼룩 카드의 해석에서도 문제를 보였다. '다 먹고 남은 추수감사절 칠면조'를 보았다는 반응에 대해 집착하고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했다. 마르텔리는 거의 굶은 상태에서 검사받았다. 그날은 추수감사절 1주 뒤였다. 먹고 남은 칠면조가 그의 냉장고에 남아 있었다. 검사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애초에 로르샤흐는 잉크 얼룩을 심리검사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평가나 제약 없이 사람들이 보는 방식을 살펴보는 조사, 다시 말해 '실험'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지각의 본질에 대해 연구할 목적으로 잉크 얼룩을 활용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느냐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보느냐에도 주목했다. '우리가 누구냐'라는 물음의 답이 '우리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로르샤흐는 직관과 재능, 시행착오, 대칭의 힘에 대한 몇몇 아이디어로 체계적이고 유연한 그림을 만들었다. 그러나 후속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로르샤흐'는 로르샤흐의 첫 번째 전기다. 얼마 되지 않는 기록과 편지 등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 이로써 로르샤흐 검사의 실체에 다가가 지각의 심리를 탐구한다. 로르샤흐가 잉크 얼룩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친구인 정신과 의사 게오르크 뢰머에게 보낸 편지에 여실히 나타난다.
"잉크 얼룩 실험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려면 먼저 학계가 아주 큰 표본을 모은 뒤 모든 분산 법칙과 상관관계를 따져 체계적이고 통계적으로 꼼꼼히 조사해야 한다네. 그렇게 한다면 차별화된 적성검사로 쓸 수 있겠지. 그렇다 해도 의사로 적합한지 아닌지, 법률가로 적합한지 아닌지를 가르는 검사는 아닐 걸세. 그보다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기초의학에 몸담아야 하는지 임상의학에 몸담아야 하는지 등을 판단하기에 적합한 검사일 걸세. (…) 무엇보다도 실험을 밑받침할 이론을 훨씬 더 탄탄하게 세워야 하네. 아주 탄탄한 이론이 밑받침되지 않는 검사를 바탕으로 그런 중대한 조처를 내리는 것은 그릇된 일이니까. 모두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한 일이지."
로르샤흐가 일찍 죽는 바람에 답을 구할 수 없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잉크 얼룩 카드 열 장이 어떻게 그토록 풍부한 반응을 끌어내느냐다. 지난 100년간 심리학자 대다수는 이론의 토대나 다름없는 이 물음을 까맣게 잊었다. 로르샤흐 검사를 반응 유도 수단으로만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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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샤흐가 일깨운 가장 가치 있는 생각은 감정이입이 말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감정이입은 반사 환각이자 통찰하는 힘. 상상이나 어떤 감각만큼 섬세하고 정확한 지각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려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로르샤흐는 이렇게 답했을지 모른다.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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