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에 죽림정사가 있다. 아름다운 절집이다. 봄이면 돌담을 따라 심은 매화가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법고를 품은 누각 아래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본디 죽림정사는 인도 마가다국에 있었다는 불교 최초의 사원을 이른다. 상서로운 사연을 담은 까닭인가. 우리나라에는 죽림정사가 참으로 많다. 경상북도 구미시에도 죽림정사가 있다. 이곳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장수군의 죽림정사는 백용성 스님의 생가 곁에 들어섰다. 스님의 생가, 대웅보전, 용성기념관 등이 단정하게 어우러졌다. 백용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분이다. 스님으로서 독립선언에 참여한 분은 만해 스님과 용성 스님 둘뿐이다. 1864년 5월 8일에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백상규(白相奎)요, 법명은 진종(震鍾)이다. 용성(龍城)이라는 법호로 널리 알려졌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스님의 입상(立像)이 순례객을 맞는다. 그 오른편에 작은 풍금이 하나 있고, 스님이 풍금을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부조가 벽을 대신했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찬불가를 가르칠 때 이 풍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스님이 풍금을 치는 모습은 언뜻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큰스님들에게는 속인(俗人)이 상상하기 어려운 특별함이 있는가.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실린 서른한 번째 시는 '포도주', 청주도 탁주도 아닌 '와인'이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 잔에 가득히 부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님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만해와의 인연이 지극하기에, 스님이 시집에서 노래한 '님'이 백용성 스님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만해의 간청에 침묵으로 답하며, 참선에 빠져든 스님을 향한 원망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만해의 님은 보통 조국, 중생 또는 불법, 희망과 이성의 상징 등으로 이해된다. 시집 '님의 침묵'에서 서시 역할을 하는 '군말'을 읽으면 만해가 노래한 님의 윤곽이 드러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백용성 스님의 삶은 현실에 눈감은 면벽 승려와 거리가 멀다. 그는 중생의 고통을 기꺼이 나누고자 했다. 일제가 1911년 사찰령을 내려 조선 불교를 접수하려 들자 폐지운동을 일으켜 저항했다. 1924년에는 불교종합지 '불일(佛日)'을 창간하여 불교 대중화에 나섰다. 1928년에는 '조선말 화엄경'을 펴내 역경사업에 불을 댕겼다. 그의 노력은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는 일이자 정신적 광복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백용성 스님은 뛰어난 선승이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구도의 삶 60년 가운데 앞선 30년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상구보리(上求菩提)요, 뒤의 30년은 중생을 불법으로 이끌고자 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다. 스님은 1940년 2월 24일 서울 대각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임종 직전 제자들에게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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