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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모자법과 유통산업발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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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희 소비자경제부장]현대 슈트의 기본 원형은 19세기 무렵 '신사의 나라'로 이름을 날리던 영국에서 태동했다. 당시의 슈트가 현재와 확연히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모자다. 영국의 멋쟁이들은 근사한 정장를 차려입고, 머리에는 반드시 높다란 모자를 썼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자전거 열풍이 영국을 강타하면서 모자가 중대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영국의 자전거 애호가들은 모자라는 물건이 자전거를 탈 때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려 벗겨지고, 타고 내릴 때도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예의와 격식에 목숨을 걸던 영국 신사들도 결국 자전거를 타기 위해 모자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호황을 누리던 모자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모자 제조사들은 이대로는 모두 죽는다며 정부에 끈질긴 로비를 했고, 그 결과 세계 경제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코미디인 '모자법'이 탄생한다. 바로 자전거를 사는 사람들은 모자도 의무적으로 구매토록 한 것이다. 정부가 규제만능주의에 함몰됐을 때 얼마나 웃긴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월이 흘러 슈트를 이루는 구성에서 모자는 완전히 빠졌지만, 정부의 단세포적 규제정책은 역사의 흐름 속에 도도히 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유통산업발전법(유발법)'이라는 게 있다. 이 법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재래시장 살리려고, 대형 할인점의 영업일을 제한한다는 정도는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최근 정부와 여당은 이 법을 강화해 스타필드·롯데몰같은 복합쇼핑몰도 규제대상에 넣으려 하고 있다. 정부는 유발법을 개정해, 대규모 점포 개설 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상권 영향평가'의 대상을 거의 전 소매업종으로 확장했다. 또 여당은 복합쇼핑몰도 주말에 문을 닫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열심히 군불을 지피는 중이다.


이런 시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대형마트가 문을 닫으면 소비자들이 재래시장에 몰릴 것이란 생각에, 마트의 주말 영업 제한을 시작한 게 벌써 7년 전이다. 하지만 재래시장은 여전히 '살려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규제대상이었던 대형 할인점들은 급기야 적자를 내는 상황에 내몰렸다. 대형마트 1위인 이마트는 지난 2분기 299억원의 영업손실로 창사 이래 첫 적자를 기록했다. 롯데마트도 339억원의 영업적자를 냈으며 홈플러스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실정이다. 그 사이 소비패턴의 변화를 눈치챈 온라인 쇼핑몰들은 새벽배송 시장으로 발빠르게 치고 나갔다.


정부와 여당이 7년간 아무 성과도 못낸 정책을 또 다시 꺼내든 것은 유통시장 변화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선거 때만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얄팍한 식견으로는 구조적 한계와 경쟁력 상실의 원인을 직시할 수 없다. 재래시장이 쇠퇴하는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대형 유통기업을 아무리 옥죄어도 사회적 진화라는 물줄기를 되돌릴 순 없는 것이다.

198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조지 스티글러는 정부의 시장 규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규제경제학'의 창시자다. 그는 '시장지배적 기업이라고 규제하는 것은 질 좋고 값싼 상품을 공급한다는 시장 본연의 기능을 저해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정부와 여당의 지금 논리대로 라면 몇 년 뒤에는 대형 할인점을 살리기 위해 온라인 쇼핑몰의 영업시간을 규제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필요 없어진 모자를 사도록 만든 19세기 영국의 '모자법'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연되고 있는 꼴이다.




이초희 기자 cho77lov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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