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서의 On Stage]반백의 그대, 웃고 울린 청춘 입영통지서
작곡가 이영훈 명곡에 스토리 입혀
1980~90년대 애수 속으로
중년 명우 '생의 마지막 1분' 회상 여행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 따라 나선
그 시절 첫사랑 수아와 명우의 모습들
'추억은 추억…현재에 충실하라' 메시지
마지막 곡 '붉은 노을' 합창 붉어진 눈시울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이문세 '광화문 연가' 중)'
가수 이문세가 1998년 발표한 다섯 번째 정규 앨범은 시집과 같다. 수록곡 중 '광화문 연가'는 무심한 세월에 청춘을 흘려보낸 화자(話者)의 기억을 애잔한 심상으로 표현했다. '그(그녀)'는 덕수궁 돌담길 아래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을 보며 '아직 그대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한다. 이 노래를 작곡ㆍ작사한 고(故) 이영훈(1960~2008)이 남긴 명곡들이 1980~1990년대의 애수를 박제한 채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광화문 연가'는 이영훈 작곡가의 곡들에 스토리를 덧입힌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서울시뮤지컬단과 CJ E&M이 공동제작하고 고선웅과 이지나가 극작과 연출로 참여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죽기 전 1분'이 작품의 모티브다. 주인공 명우가 숨지기 직전 떠올리는 기억을 통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옛 시절로 관객을 이끈다.
극의 시점은 2017년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무대 중앙에 설치된 나선형 계단과 흰 커튼, 흰옷을 입은 인물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천상의 세계를 암시한다. 중년의 명우는 임종을 1분 앞두고 사경을 헤매는 중이다. 죽기 전 그는 기억의 전시관을 찾아가 그곳에서 인연을 관장하는 '월하'를 만난다. 월하는 성별과 실제 나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이다. 유머러스하고 인생을 달관한 말로 인간미를 풍기다가도 인연의 시작과 끝을 담담하게 묶고 끊는 냉정함을 보인다. 더 풍부한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혼성 더블캐스팅(정성화ㆍ차지연)으로 선보인다.
시간여행의 안내자인 월하가 명우를 데려간 곳은 그가 연인 수아를 처음 만난 1984년 봄 덕수궁 사생대회다. 젊은 명우는 당차고 명랑한 수아에게 반해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먼저 대학에 진학한 수아의 시위 장면을 목격한 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수아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이후 명우는 군에 입대하고 수아는 운동권에 투신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더 깊어지지 못한 채 깊은 그리움만 남긴다. 작품은 시대적 상황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대신 배경으로만 활용한다. 학생운동과 MT, 나이트클럽, 군 입대, 2002년 한일월드컵 등 각 장면에 어울리는 노래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관객의 마음 역시 그 시절을 살아낸 각자의 기억을 떠돈다.
이지나 연출은 제작 노트에서 "사랑이란 어쩌면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게 기억 속에서 얼마나 변형되고 채색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이 연결돼 있는 이야기에서 내가 살아온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고 했다.
중년 명우는 월하와 함께 자신의 기억을 여행하며 젊은 시절의 아쉬움과 후회, 환상과 기억, 현실이 교차하는 기억의 빈집과 마주한다. 그리고 젊은 명우와 수아를 지켜보며 추억에 잠긴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라는 중년 명우의 독백은 이문세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의 가사를 차용한 대사로, 극의 중요 내러티브로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이영훈의 곡들은 극 전체를 아우른다. 고선웅 작가는 노래를 뼈대 삼아 큰 그림을 짰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노래를 잘 들려줄 수 있는 구조가 중요했다"면서 "그 구조가 어긋나면 자칫 지루해지거나 좋은 곡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주인공 명우가 과거에 집착해 죽기 직전까지 수아를 떠올리는 모습에 대해서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고 작가는 "추억은 추억으로 족하다. 미련하리만치 옛사랑에 취해 살았던 주인공을 통해 현재에 더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지금 여기다. 무지개는 멀리 있지 않다"고 했다.
스물여덟 곡이나 되는 넘버(노래)는 그 자체가 서사이고 대사 역할을 한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깊은 밤을 날아서' '그게 나였어' '가을이 오면' '휘파람' '그녀의 웃음소리뿐' '슬픈 사랑의 노래'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등이 사용됐다. 원곡의 장르는 팝 발라드지만 오케스트라 편곡에 맞춰 클래식과 댄스 장르로 편곡돼 역동성을 더했다. 이 중 '옛사랑과' '사랑이 지나가면'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로 감성을 자극한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커져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옛사랑 중)'
중년 명우와 연배가 비슷한 관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음으로만 곱씹고 만개하지 못했던 사랑은 기억에서나마 의미를 찾고 세상과의 이별을 돕는다. 막이 내리고 배우와 관객이 다 함께 부르는 '붉은 노을'은 과거와 현재,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선 해피엔드를 지향하고 있다. '지난날에 후회 없기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기'라는 현재진행형 행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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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던 그대 모습을/ 이젠 볼 순 없겠지만/ 후횐 없어 그저 바라볼 수 있게 붉게 타주오/ … / 해가 뜨고 해가 지네/ 노을빛에 슬퍼지네/ 달이 뜨고 달이 지네/ 그대 기억 또한 무뎌지네/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붉은 노을 중)'
중년 명우 역은 안재욱ㆍ이건명ㆍ이경준, 젊은 명우 역은 허도영ㆍ김성규ㆍ박강현이 맡는다. 중년 수아 역에는 이연경ㆍ임강희, 젊은 수아 역에는 홍은주ㆍ린지, 명우의 아내 시영 역에는 유미ㆍ이하나가 출연한다. 이 밖에 서울시뮤지컬단 단원들이 함께한다. 내년 1월1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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