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채은의 인생소설]병산읍지편찬약사
이데올로기라는 추상이 한명 한명의 구체적인 생의 서사에 새겨드는 방식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아부지 아이다, 울 아부지 아이다"(45쪽)
아이가 고함친다. 사내는 손바닥으로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아이가 운다. "조용히 해라" 사내가 손가락 사이를 조금 벌려줬다. 사내는 아이를 들쳐 업고 빠르게 밭을 지나 산길을 걸었다. 아이는 꺼이꺼이 운다. 한참을 걷는다. 사내가 아이를 내려준다. 아이는 집 삽짝에 들어서곤 쓰러져버렸다. 한동안 열병을 앓았다.
소설집 '병산읍지편찬약사'에 실린 단편 '물구나무 서는 아이'의 한 장면. 아이는 보도연맹원으로 지목된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경찰서 주변을 맴돌며 대성통곡했다. 경찰이 아이에게 애비 이름을 대라고 했다. 아이는 '김태범, 지곡마을'이라고 했다. 낯선 사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사내는 얼굴을 가렸다. 생판 모르는 아저씨가 아이 아버지 행세를 했다. 그렇게 사내는 구금에서 빠져나왔다. 대신 아이는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아이가 여섯 살 때 겪은 일이다.
"니거 아버지 모두 뺄갱이 아이가."(46쪽) 아이는 담임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국민학교 4학년 때다. 아이의 아버지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담임은 "6ㆍ25 때 이북 넘어간 친척,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이웃 사람들이 간첩이 되어 집에 찾아온다"며 아이를 멸시하고 타박한다. 아이는 '우리의 맹세'를 외운다. 뼈에 사무치게 반공 교육을 받는다. 물구나무를 서며 아버지와 거꾸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아이는 강퍅한 어른으로 자란다. '빨갱이 자식'이란 딱지를 떼고자 발버둥 친다. '간첩은 표시없다 너도나도 살펴보자'라는 표어를 가슴에 새긴다. 애꿎은 사람을 간첩으로 믿는다. 아이에게 '색깔'이 덧입혀지는 과정이다.
작가 조갑상은 '이데올로기'라는 추상적 사유체계가 한명 한명의 구체적인 생의 서사에 어떻게 새겨지는지를 예민하게 응시한다. '반공'과 '종북몰이', '레드컴플렉스'가 무명씨들의 삶의 갈피를 어떻게 뒤흔드는지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한다. 중심소재로 가져온 것은 '국민보도연맹'이다. 좌익분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단체다. 좌익과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이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보도연맹원들은 총살당한다.
표제작이기도 한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제목이 어렵다. 병산은 지명이다. 읍지는 지역의 연혁, 지리, 인물, 문화, 풍속 따위를 채록한 책이다. 편찬은 책을 만듦, 약사는 '간략히 줄여서 기록한 역사'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의 제목은 '특정 지역의 역사와 정보를 모아 만든 책을 엮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짧은 역사'다. 그래서 등장인물은 네 명만 나온다. 집필자, 편찬위원장, 편집위원장, 부위원장이다. 편찬위원장은 병산의 역사를 다룬 글에 보도연맹 사건을 언급한 것이 못마땅하다. '좌빨 글'이 되는 게 싫다는 이유다. 편집자들의 왜곡에 의해 보도연맹과 관련된 기록은 삭제된다. 역사의 왜곡과 윤색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작가는 보도연맹 사건을 겪은 여러 위치의 인물들을 다양한 시간대에서 조망한다. 보도연맹원 아버지를 두었거나(물구나무 서기), 보도연맹에 가입된 장인을 총살하려는 차량에 태워 보냈다거나(해후), 보도연맹 사건을 기록하는 역사학자(병산읍지편찬약사)의 시점에서 다루는 방식이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담았다는 점에서 '라쇼몽'과 비슷한 전개다. 사건은 하나다. 인물들의 진술은 여럿이다. 진실이 엇갈리고 긴장하며 부딪히기도 한다. 분단현실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청준의 '전짓불의 공포'를 떠올리게도 한다.
종북, 빨갱이, 좌빨 등 한국사회에서 첨예한 소재인 '색깔론'의 출처를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날개를 보았더니 작가 사진이 실려 있다. 주름이 많고 귀밑머리가 하얗다. 약력을 보니 1949년생이고 1980년 등단했다. 한국전쟁과 민주화 항쟁 등 굵직한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중견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묵직한 시선을 담고 있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양경언은 "편집된 역사를 상대하는 소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지, 사라진 입들의 현장을 가로지르는 소설은 어디까지를 나아가서 말할 수 있는 지 심문하는 듯 보인다"는 평을 달았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분단은 너무나 엄연해서 오히려 잊고 있거나 왜곡과 업악을 마냥 허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고 썼다.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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