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이 된 그녀


 도심 속 골목, 전당포를 향해 걷는다

 니도 한번 애 키우며 살아 봐라,


 독감처럼 쿨럭대는 엄마 말을 떠올리며 걷는다

 결혼 예물로 받은 반지, 팔찌, 목걸이를 맡긴다


 엄지와 검지로


 주머니 속 지폐를 세고 또 세다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


 골목을 돌아 나오는


 머릿속이 하얗게 센 그녀가


 주머니 속 지폐를 움켜쥐고 종종걸음 친다


 울분과 불안이 일렁이는


 운명과 손잡을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는


 그녀가 대로에 합류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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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아직은, 시간이 있는/박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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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에 물건을 잠시 맡기고 돈을 빌릴 때 흔히 '물건을 잡히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때 '잡히다'는 '잡다'의 여러 의미들 가운데 하나인 '담보로 설정하다'의 피동형이다. 물론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잡히다'가 피동형이라면 주어는 '물건'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물건'을 목적어로 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 '물건'에 대한, 단지 소유욕 따위가 아닌, 그야말로 애착과 기억 때문일 것이다. "결혼 예물"을 맡기고 "골목을 돌아 나오는" 그녀의 "머릿속"은 그래, 그 잠시 동안에 "하얗게" 세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은 다 겪는 일이라고 쉽게 토닥거리지 마라. '그녀'가 저당 잡힌 건 그저 "결혼 예물"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니.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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