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핀 여인에 매화병풍 선물하고 딱 끊은 '장승업 이별법'
김희윤의 '시네한수' - 임권택 감독 '취화선', 헤어지는데도 품격이 있다는 걸 그림같이 보여주다
주기적으로 돈을 벌어오긴 커녕 틈만 나면 술 가져와라 생떼에 며칠 집에 붙어있나 싶으면 금세 봇짐 싸들고 방랑을 일삼는 남자라면, 아무리 천재적 재능을 가졌다 해도 남편으론 실격을 넘어 합리적 이혼대상이 아닐까. 오원 장승업은 그런점에 충분히 부합하는 나쁜남자, 아니 나쁜놈이었다. 사진 = 영화 <취화선> 스틸컷
아름다운 이별은 가능한 것일까?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 앞에 여느 솔로들은 코웃음을 치지만, 정작 체면치레는 하고자 이별의 순간엔 다들 정중한 척 갖은 핑계를 동원하게 된다. 함께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이 주는 안온함이 그리워, 깨진 그릇 붙여보고자 애걸하지만 앞서 그릇은 깨진 즉시 칼날이 되어 마음을 사정없이 베어낸 뒤. 그래서 이별은 어렵고, 아픈가보다.
천진한 망나니를 품고 산 기생의 절규
오원 장승업은 남긴 작품에 비해 삶의 일화가 많지 않은 조선 후기의 화가. 그의 삶을 탄실하게 그려낸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술과 그림 너머 그의 여자문제도 가감 없이 표현한다. 깐깐한 선비로부터 “그림에 깊이는 없고 그저 재주만 보인다”는 야유를 듣고 온 오원은 잔뜩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와 공연히 술 더 내오라 동거인 진향에 울골질 해대고, 취중에 제 손으로 쓱쓱 그림을 그려놓고는 다음날 천연히 누가 다녀갔냐며 친구 평산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진향의 옛 남자이자 오원의 친구인 평산의 이름이 나오자 격분한 그녀는 평산이가 뭐 어쨌냐 고래고래 소리 지른 뒤 박복한 자신의 삶을 자조하며 본격 바가지 긁기에 나서는데….
"그래, 나 평산이랑도 붙어먹고, 기산이랑도 살았다. 기생년이 이놈 저놈 붙어간 게 그리 흉이냐? 내가 니놈하고 속궁합만 맞아서 산 줄 알아? 애들 마냥 천진스럽고 착해빠진 심성에 정 붙이고 산거지. 그래 내가 미친년이여. 셋집까지 얻어 살림 차린 내가 미친년이다!"
출신이 천애고아 거지 였다는건 차치하고서라도 한 번 집을 나섰다 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알 길 없는 시간을 온전히 그를 기다리는 데 쏟아야 했던 여인은 그를 끝내 놔버리고 만다. 사진 = 영화 <취화선> 스틸컷
원본보기 아이콘천재의 방랑벽과 살림살이의 고통
오원의 무수한 여자 중 한 명이었을 진향의 지난한 ‘사실혼’ 기간 중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천재 화가는 무엇이든 제 눈에 담고, 두 발로 천지사방을 누비며 체득한 것을 재료 삼아 그림을 그렸기에 방랑벽은 당연지사요, 생활의 무게는 오롯이 진향의 몫이었다. 그녀의 바가지는 계속 이어진다.
"이 개자식. 그림 판 돈으로 판판이 마시고 돌아다녔지, 여태 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 그 잘난 붕어 그림 달랑 하나 그려놓고는 사방 빈 벽 구석에 장롱 한 짝 채워줘 봤어, 끼니 걱정돼 쌀바가지 들고 와 봤어?"
애당초 그런 종류의 일에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장승업은 그길로 귀가한지 며칠 만에 도로 봇짐을 싸 집을 나선다. 이제 이 생활이 지긋지긋한 진향은 될 대로 되라, 분노어린 체념의 경지에 이른다.
"누가 나간다고 하면 겁낼 줄 알어, 내가? 어디 한두 번 기어나갔냐? 니가? 그래, 가라 가. 겁 안나 내가."
모른체 외면했던 아내의 바가지였어도 그 말을 내심 품고 있던 장승업은 집에 돌아오던 날 화초장을 사들고 왔지만, 그를 반긴 건 친구와 정사를 즐기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방금 집에 들여놓은 화초장을 사정없이 두들겨 깨부수는 장승업의 분노는 모든 남자가 공감할 대목일 것이다. 사진 = 영화 <취화선> 스틸컷
원본보기 아이콘제 손으로 부순 화초장, 깨져버린 믿음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장승업은 저자를 지나던 중 잘 만든 화초장을 보고 발길을 멈춰 세운다. 사방 빈 벽 구석 마주하며 그래도 서방이라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진향 생각에 잰걸음으로 향한 집, 마루에 화초장을 떡 하니 두고 그녀를 부르려 방문을 여는 찰나. 아뿔싸! 처용마냥 4개의 다리를 보고는, 2개는 내 것인데 내 것 아닌 2개는 이내 창문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진다. 격분한 장승업, 화초장 날라 온 일꾼이 사립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절굿공이 집어 들어 냅다 때려 부수고는, 날이 저물자 박살 난 화초장 옆에 주저앉아 술에 취해 진향에게 욕을 퍼붓는다.
이에 질세라 방에서 나온 진향, 젊은 여자가 그럼 허구한 날 독수공방하겠냐 따져 묻는데 승업은 상대가 누구냐 되묻는다. ‘평산’이란 말이 되돌아오자 격분한 승업, 왜 하필 그 놈이냐 절규하는 모습에는 저 잘못 생각 안하고 여자만 때려잡는 마음보다 상대가 면식범, 거기다 동종업계 친구라는 사실이 더 크게 내려앉는다. 다 집어치우고 나가려는 장승업을 붙잡는 진향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더 살자 안 하겠으나 돈 되는 그림 하나는 받아야겠다 달려들고, 이튿날 곱게 차려입은 진향이 술상을 봐오면 의관정제한 오원이 큼지막한 화선지 위에 붉고 흰 매화를 한가득 피워낸다. 어젯밤 호기는 어디 가고 아련한 표정의 진향이 두 손 싹싹 빌어보지만 그림을 다 그린 장승업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리서 일어나 또다시 방랑길에 오른다.
곱게 차려입고 다시금 장승업의 마음을 돌려보려 진홍은 애쓰지만, 차갑게 식은 남자의 마음은 그림 한 폭을 남긴 채 영영 그녀를 떠나버린다. 사진 = 영화 <취화선> 스틸컷
원본보기 아이콘이별의 증표? 사실혼 위자료!
오원의 대표작이 대부분 화폭이 세로로 긴 작품들인지라 진향에게 홍백매 그려주는 풍경은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와 화폭, 그리고 그 필치가 함께 온전히 담긴 장면이다. 흘깃 훔쳐보며 혼자 가슴 앓던 첫사랑 소운, 스치듯 만난 인연이 채 깊어지기 전에 헤어진 기생 매향과 살을 맞대고 생활을 공유한 진향은 달랐다. 이제 그를 붙잡아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진향은 바람처럼 떠난 오원에 질세라 그림에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저자에 내다 팔아버린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 촬영 전 마주한 홍백매십곡병을 보고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과 기운을 느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지독한 사랑 끝에 남은 석별의 위자료로 화폭에 만발한 매화를 놓은 감독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장승업은 화조도 싫다, 돈 되는 매화 병풍 그려내라 그악스레 달려든 진향과의 사랑에 홍백매 종지부를 찍음으로 돌아올 곳을 없애 화사의 길에 정진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의 이별은 이처럼 ‘품격’이 있었고, 화사는 떠났으되 그 향기는 여태껏 온전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17일 수원지법은 이혼조정 기간 중 자신과 재결합을 거부한 아내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40대 남성 김 모 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한 지붕 아래 얼굴 맞대고 산 이성 간의 이별은 어떤 방식으로든 쉽지 않은 일이며, 천 년 전 처용의 일화는 아내의 부정을 참아낸 남편의 결단이 얼마나 관대한 처사였는지를 오늘날까지 시사한다는 점에서 오원의 홍백매는 한 천재 화가가 남긴 이별의 품격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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