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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샅샅이 읽기② 전씨 정권이양 때, 연임 할 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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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증명된 5.18때 헬기 사격 사실을 "악의적 주장" 일축…5.18재단 '회고록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 준비


취임 전 신군부 세력을 통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내각장악을 위한 명분을 위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 임시 행정 기구로 5·18 광주의 시위를 진압하고 소요가 잠잠해지자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국보위를 출범시킨 뒤 자신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사진 = 취임 전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 이순자 부부. 대통령기록관 제공

취임 전 신군부 세력을 통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내각장악을 위한 명분을 위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 임시 행정 기구로 5·18 광주의 시위를 진압하고 소요가 잠잠해지자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국보위를 출범시킨 뒤 자신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사진 = 취임 전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 이순자 부부. 대통령기록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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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길 이외에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나에게 운명처럼 그렇게 나라의 부름이 찾아왔다." 자신의 의지에서 한 발 물러나 '운명'이라 표현하는 그의 쿠데타와 집권 과정을 역사가 '군림'하고 '통치'라고 기록하는 것에 그는 줄곧 불쾌감을 드러낸다. 스스로 씻김 굿의 제물을 자처했으나, 죽은 제물이 일어나 펄쩍 뛰는 광경은 충격이자 공포로 다가오기 마련. 그는 재임 말기 자신의 '평화적 정권이양'을 공적으로 치켜세우며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은 직접 노태우 전 대통령을 상대로 설득했으며, 어떻게 해서든 군 동원은 피하고 싶었다고 피력하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사망 사건을 도화선으로 한 6월 항쟁에 대해서는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병력 출동을 지시했으나 오후 4시 출동 유보를 지시했다고 털어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민정당 전당대회에 앞서 4·13 호헌조치를 통해 간선제 현행 헌법을 고수하며 1988년 2월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선언했으나, 이는 그에 대한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에 대한 비판을 격화시키며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적 시위를 초래했다. 1987년 6월 10일 전 씨는 전당대회를 통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자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노태우의 6·29 수습 선언과 10월 27일 직선제 개헌이란 결과를 불러왔다. 사진 = 대통령기록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민정당 전당대회에 앞서 4·13 호헌조치를 통해 간선제 현행 헌법을 고수하며 1988년 2월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선언했으나, 이는 그에 대한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에 대한 비판을 격화시키며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적 시위를 초래했다. 1987년 6월 10일 전 씨는 전당대회를 통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자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노태우의 6·29 수습 선언과 10월 27일 직선제 개헌이란 결과를 불러왔다. 사진 =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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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래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
전두환 씨는 회고록 서문에서 자신의 정권이양을 두고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하루도 더 머물지 않고 청와대를 떠나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권력 순환의 순리가 전통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며, "내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소정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고 정부를 평화적으로 후임에게 이양한 것"이라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하지만 1986년 방한한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과의 면담에서 그가 한 발언은 당시 그의 결심이 그리 공고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전 씨가 "정치인으로서 경험이 없어 실수한 것이 하나 있다. 현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단임 약속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라 발언한 내용이 지난 11일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난 것.

그는 이어 "한국의 정치는 거짓말도 좀 하는 사람이 해야지 정직한 사람은 정치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이듬해 4월 13일 호헌조치를 통해 "본인의 단임 의지가 확고한 이상 사실 헌법과 관련해서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내용으로, 앞서 회고록에 '현대 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웠다'는 구절은 연임에 대한 아쉬움을 억누르고, 약속을 지켜낸 자신에 대한 조금 과한 상찬으로 풀이된다.

국보위위원장을 거쳐 간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정통성 확보와 대내외 선전효과를 위해 당시 미 대통령으로 당선된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다각도로 준비했으나, 전 전 대통령으로 인해 빚어진 국내의 소요사태를 두고 미국이 '인권문제'를 걸고 넘어지자 그는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김대중의 감형을 조건으로 제시해 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유병현 전 합참의장 회고록 기록) 사진 = 대통령기록관

국보위위원장을 거쳐 간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정통성 확보와 대내외 선전효과를 위해 당시 미 대통령으로 당선된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다각도로 준비했으나, 전 전 대통령으로 인해 빚어진 국내의 소요사태를 두고 미국이 '인권문제'를 걸고 넘어지자 그는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김대중의 감형을 조건으로 제시해 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유병현 전 합참의장 회고록 기록) 사진 =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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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통치력의 근원은 '대통령의 권위'

전 씨는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한 시점을 '위기적 상황'으로 보고, '강력한 통치력' 발휘를 위해 임기 마지막 날까지 '대통령직의 권위와 권한을 온전히 확보'하고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아울러 다수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간에는 여유가 없었고,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다.

하지만 이내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았고 단편적 정보만 접해본 젊은 세대들'이 5·18 당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다는 자기변명과 함께 1980년 계엄군 지휘관 진술 서류(광주 소요사태 분석 교훈집문서)를 통해 증명된 헬기 사격 사실은 '악의적 주장'이고, 이를 증언했던 피터슨 목사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 매도하며, 추측을 통해 북한 특수군 개입을 주장하는 확증편향적 입장을 유지한다.

1997년 대법원은 5·18 관련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 작전을 강행하고 이를 명령한 데에는 그 작전 범위 내에서 사람을 살해하여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있었음이 분명하며 광주시위의 조속한 제압하지 아니하면 집권에 성공할 수 없는 중요한 상황이었으므로 피고인 (전두환)은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당선인과 김영삼 대통령의 회통을 통해 결정됐는데, 당시 IMF 경제 위기에 직면한 국민에게 대통합과 국난극복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성격이 담겨있었다. 사진 =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당선인과 김영삼 대통령의 회통을 통해 결정됐는데, 당시 IMF 경제 위기에 직면한 국민에게 대통합과 국난극복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성격이 담겨있었다. 사진 =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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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발간을 '역사적 쿠데타'로 규정한 5·18기념재단은 지난 9일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판매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앞서 논평을 통해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이자 5·18 학살의 주범인 전 씨가 치졸한 변명과 망발을 늘어놓았다"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역사적 심판과 정치적 용서로 희미해졌던 사건은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다시 한번 법정에 서게 될 전망이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는 경쟁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었으나, 김대중 당선자가 김영삼 대통령과 협의 후 당선 이틀 뒤인 12월 21일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결정했다. '대통령의 사면권한'은 금번 대선에서도 한차례 논란거리가 된 바 있으나, 전 씨의 경우엔 사면 후 거침없는 행보로 '고난의 정치역정을 딛고 한 용서'를 원점으로 돌리고, 12·12가 쿠데타로 규정된 배경으로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지목한 뒤 이들 또한 자신이 다져놓은 '평화적 정권 교체의 수혜자'들이라 기술했다.

기억은 각자 다르게 적히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역사가 기록하는 제5공화국은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 도둑정치, 강도정치) 그 자체였다. 너무 빠른 용서는 또 한 번의 법정공방을 예고하며, 대선 정국을 앞두고 매일 같이 호명되는 '적폐청산'이란 말을 무색케 하고 있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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