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1930년 이후에 태어나 일본어를 제대로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한 '신세대'는 해독 가능한 언어가 한국어밖에 없었다. 미군 점령기를 거치면서 영어가 일본어를 대신해 급속히 제1외국어의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한국어와 문법 체계가 판이한 영어를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본어를 읽을 수 없는 문학청년들은 결국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와 '한국어'라고 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글이라는 외딴 섬에 갇혀버린 것이다.
번역은 한 나라의 학문 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어서 여권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어만으로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한다.
과연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글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 성취가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하다. 어림도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글의 콘텐츠가 턱없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이란 무엇일까. 모국어로 세계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는 일본이 부럽지 않은가. 요즘 젊은 세대의 영어 실력이 좋아졌으니 영어로 읽고 쓰면 되지 않느냐고? 제아무리 영어 도사들이 많이 출현해도 그들이 '우리말'로 그들의 학식을 표현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우리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대선 정국이다. 선거판이 달아오르면서 네거티브 공방이 치열하다. 막말과 흠집 내기가 요란하다. 이런 시기에 번역청 설립 같은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공약을 발표하는 캠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번역은 인문학의 뿌리다. 다 죽어가는 우리 인문학을 소생시키는 근원적 처방이자, 지식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다. 이를 입증할 역사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정책이기도 하다. 이런 국가기관을 일본만 운영한 것도 아니다. 유럽연합(EU) 번역총국(Directorate-General for Translation), 캐나다 번역국(Translation Bureau) 등의 사례도 있다. 굳이 번역청 명칭을 고집할 것도 없다. 번역원, 번역국, 번역위원회 등도 좋다.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를 뿌리부터 살려낼 수 있는 획기적 처방이다. 누가 번역청 설립 공약을 선점할 것인가.
박상익 우석대 역사학 교수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