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오후 한詩]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 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섞여야
 그제야 후끈 달아오르는가
 왜 단도직입이 없고 워밍업이 필요한가
 오늘은 내가 밥공기를 박박 긁으며
 네게 말한다
 언제 한번 또 밥이나 먹자고

[오후 한詩]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AD
원본보기 아이콘

 밥 한 끼 나누어 먹는 일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싶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당장 먹고사는 일과 관련이 없거나 특별히 여럿이서 모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은 빈말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럴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 "밥이나 한번 먹"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말이다. 어쩌다 다행히 그 말이 정말이 되어 홀연히 단 둘이 앉게 되면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짝 서먹하고 왠지 불편하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의 말 그대로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주문을 하고 밥을 먹고 날씨 얘기나 하고 그런다. 왜 그럴까? 사람들마다 그 이유야 다르겠지만 아마도 좀 서운해서이지 않을까, 서운하기도 하고 또 그런 만큼 미안하기도 해서. '그래, 지난 서너 달 동안 나 참 쓸쓸했는데, 너도 그랬구나', 이 한마디 건네고 싶었는데 내내 밥공기나 "박박 긁으며" 차마 그러지는 못 하고 눈치나 보고 말이다. "밥이나 한번 먹자"라는 말, 그러니까 그 말은 단지 쓸쓸함을 넘어 간절하게 사람이 그리웠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뜻인 셈이다. 친구야, 전화해라. 밥이나 한번 먹자. 그보다 만나면 일단 먼저 꼭 끌어안기다.
채상우 시인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우원식,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 당선…추미애 탈락 이변 尹 "부처님 마음 새기며 국정 최선 다할 것"…조국과 악수(종합2보) 尹 "늘 부처님 마음 새기며 올바른 국정 펼치기 위해 최선 다할 것"(종합)

    #국내이슈

  • "학대와 성희롱 있었다"…왕관반납 미인대회 우승자 어머니 폭로 "1000엔 짜리 라멘 누가 먹겠냐"…'사중고' 버티는 일본 라멘집 여배우 '이것' 안 씌우고 촬영 적발…징역형 선고받은 감독 망명

    #해외이슈

  • 이창수 신임 서울중앙지검장, 김 여사 수사 "법과 원칙 따라 제대로 진행" 햄버거에 비닐장갑…프랜차이즈 업체, 증거 회수한 뒤 ‘모르쇠’ '비계 삼겹살' 논란 커지자…제주도 "흑돼지 명성 되찾겠다"

    #포토PICK

  • [르포]AWS 손잡은 현대차, 자율주행 시뮬레이션도 클라우드로 "역대 가장 강한 S클래스"…AMG S63E 퍼포먼스 국내 출시 크기부터 색상까지 선택폭 넓힌 신형 디펜더

    #CAR라이프

  • 세계랭킹 2위 매킬로이 "결혼 생활 파탄이 났다" [뉴스속 용어]머스크, 엑스 검열에 대해 '체리 피킹' [뉴스속 용어]교황, '2025년 희년' 공식 선포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