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날에 부쳐

별빛에 스치는 바람, 바람에 스치는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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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꺼내세요.


라디오의 시보가 자정을 알릴 때. 시침과 분침을 아라비아 숫자 12나 로마숫자 ⅩⅡ, 그것도 아니라면 가장 굵게 새긴 점에다 맞춥니다. 됐습니다.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공장에서 나올 때 배터리를 넣었으니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아무 일 없겠지요. 초침이 약간 맞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별들의 운행에도 오차가 있는 걸요.

당신은 시간을 어디에 맞추었습니까. 밤 열두 시? 아니면 영 시?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게 그거죠. 어디가 그게 그거냐고요? 맞습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다. 시침과 분침이 숫자 12 위에서 겹칠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시침과 분침이 숫자 ⅩⅡ 위에서 겹칠 때 다시 깨닫습니다. 또 하루를 살 것입니다.


달포를 걸어야 순례를 마치는 산티아고길.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그 길에 오릅니다. 조가비 도장을 받으며 하루하루 목적지에 가까워질 때, 숨 가쁜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성 야고보의 축복을 받는 그 순간에 순례객들은 온몸으로 느낍니다. 열두 시와 영 시가 어김없이 겹치는 기적의 순간! 이제 모든 것이 끝이며, 또한 시작입니다.

겨울이라지요. 얼어붙은 저 들녘은 오로지 죽음만을 보여줍니다. 계절은 짐짓 잔혹한 듯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죽은 땅이 라일락을 피워내는 황무지의 기적을 우리는 믿습니다. 설령 그곳이 사막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러하기에 더욱 놀라운 생명의 선언!


우리는 모래시계를 뒤집음으로써 시간의 종말과 탄생을 함께 봅니다. 비통하나 위대했던 한 시기를 지나쳐 반드시 자유롭고 행복하며 정의로운 한 시대를 살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변화는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기적이 그렇듯이, 고뇌와 결단의 순간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리셋(Reset)의 또 다른 의미는 리스타트(Restart)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둘은 하나를 말하는 두 단어가 아니며 그곳에 위로와 희망이, 용서와 사랑이 잠복함을. 그렇기에 우리는 그토록 따뜻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고자 애쓰는 것이지요. 영 시와 열두 시 사이, 끝이 없으며 생살 푸른 현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얼굴을 맞대고 있습니다.


모든 출발은 만남을 지향합니다. 만남은 인연의 후과입니다. 그러기에 인연의 화살은 캄캄한 밤에도 과녁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만남은 별빛에 스치는 청정한 바람, 그 바람에 스치는 별빛 같기를. 순간이 허공을 향한 울음과 같을지라도, 삶의 어떠한 국면도 사람을 향하기에 우리는 지치지 않으며 영원히 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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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시인ㆍ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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