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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 달과 지구…당연한 관계의 한쪽이 비었을 때

최종수정 2016.12.28 09:33 기사입력 2016.12.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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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사진’에서 왜 달에서 본 지구돋이의 낯선 충격을 떠올렸을까


달의 뒷편에서 달과 지구를 촬영한 사진, 합성처럼 보이는 이 광경은 미국 항공우주국 NASA가 지난 2009년 쏘아올린 LRO(Lunar Reconnaissance Orbiter, 달궤도정찰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 NASA

달의 뒷편에서 달과 지구를 촬영한 사진, 합성처럼 보이는 이 광경은 미국 항공우주국 NASA가 지난 2009년 쏘아올린 LRO(Lunar Reconnaissance Orbiter, 달궤도정찰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 NASA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지금 저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다 같이 달을 보고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 이백의 시 ‘把酒問月(파주문월)’ 중에서


과거의 당신, 그리고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달은 같은 달일까. 시공을 초월한 대상의 항상성은 바라보는 모든 이의 가슴에 까닭모를 안온(安穩)을 선사하지만, 문득 변해가는 스스로를 깨달은 인간은 이내 그 유한함을 마주하곤 비탄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런 인간의 몸부림은 때때로 처절을 넘어 처연하기까지 하나, 은은히 빛나는 달 앞에선 무용할 뿐. 오늘 내가 바라본 달은 옛사람 누군가, 그리고 미래의 형장 망막에 맺힌 그 모습 그대로였고, 일 것이다.


잘린 사진 속 나, 그리고 당신
외모가 박한 탓에 사진 찍기를 몹시 싫어하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시 쓰는 일을 업으로 했는데, 하루는 신문사로부터 사진 한 장 보내줄 것을 요청받고는 망설이다 4~5년 전쯤 찍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든다. 약혼사진, 사진 속 자신을 잘라내 신문사에 보내곤 남은 사진 속 약혼녀를 응시한다. 함께 있는 모습 속 그녀는 귀엽고 아름다운 열일곱 소녀였건만, 손에 쥐어 든 사진 속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남자는 맥없이 깨진 오랜 꿈을 아쉬워한다. 아마 신문에 실린 자신을 본 그녀 역시 이런 남자를 사랑한 스스로를 분하게 생각할 거라 자조 섞인 상상도 덧붙이면서.


달에서 본 지구

다시 달 얘기로 돌아가서, 지구에서 달은 얼마나 멀까? 평균 거리는 약 384,000km로 이 거리 안에 태양계 전 행성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멀다. 자전주기는 약 27.3215일, 공전주기 역시 약 27.3215일로 약 30일마다 한 번씩 지구를 공전, 자전하고 있으며, 달에서의 하루는 29.5일이고, 달의 하늘엔 지구가 둥실 떠있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한다. 달은 자전주기와 지구를 도는 공전주기가 같기 때문에 시시각각 모양은 변하되 같은 면만 지구에게 보여주고, 달에서 바라본 지구는 정지한 듯 한자리에 고정되어있다. 지구에겐 초승달, 반달, 보름달이 있지만, 달은 오직 보름지구만 봐온 셈.


미국 항공 우주국(NASA) 아폴로 8호가 1968년 12월 24일 달 표면 가까이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AS8-14-2383HR는 '지구돋이'라는 이름이 붙어 인류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황무지 사진작가인 갤런 로웰은 이 사진을 두고 "이제까지의 사진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사진 = 미국 항공 우주국(NASA)

미국 항공 우주국(NASA) 아폴로 8호가 1968년 12월 24일 달 표면 가까이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AS8-14-2383HR는 '지구돋이'라는 이름이 붙어 인류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황무지 사진작가인 갤런 로웰은 이 사진을 두고 "이제까지의 사진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사진 = 미국 항공 우주국(NASA)


지구돋이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아폴로 11호였지만 그에 앞서 ‘달에서 본 지구’로 널리 알려진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의 ‘지구돋이(Earthrise)’ 사진은 달 표면에 근접한 아폴로 8호에서 지구를 바라본 풍경이었다. 아폴로 8호 발사시점인 1968년까지만 해도 유인 달 착륙은 실현이 어려운 숙제였고, 대신 이를 치밀하게 준비하기 위해 발사된 아폴로 8호가 최초로 지구궤도를 벗어나 비행 끝에 달 궤도에 진입, 인류가 미처 볼 수 없었던 달의 이면(裏面)을 확인하고 달의 ‘관점’에서 지구를 사진에 남겼다. 사실 달 표면에선 지구돋이가 아닌 보름지구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기에 이 사진은 달도, 지구도 아닌 3인칭 시점에서 지구를 바라본 것일 터. 이 한 장의 사진 속엔 보이지 않는 전 인류와 세계가 담겨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사진>이 담은 남자의 심경변화는 시절을 아끼고 기다릴 줄 몰랐던 자신의 조급함을 여과없이 드러냄과 동시에 다시 오지 않을 순간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기억은 끊임없이 왜곡되고 추억은 다르게 적히기 마련. 남자는 애써 그 여자도 자신을 보고 뜨악했을 것이라 자조 섞인 위무를 보탠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사진>이 담은 남자의 심경변화는 시절을 아끼고 기다릴 줄 몰랐던 자신의 조급함을 여과없이 드러냄과 동시에 다시 오지 않을 순간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기억은 끊임없이 왜곡되고 추억은 다르게 적히기 마련. 남자는 애써 그 여자도 자신을 보고 뜨악했을 것이라 자조 섞인 위무를 보탠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당신과 나의 우주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수성부터 명왕성까지 행성들을 일렬종대 시킬 수 있을 만큼 멀지만, 지구가 달에 미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지구돋이는 사실 달에 닿지 못한 인류의 욕망이 빚어낸 찰나의 순간이었고, 달에서 바라본 지구는 영롱하되 한결같았다. 행성으로서의 지구는 위성인 달을 온전히 지배하고, 달은 지구의 곁을 여태 지켜왔지만 지배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의 미묘한 지점을 본다면 온전한 종속관계로만 바라볼 순 없을 것이다.

남자는 사진에서 자신을 잘라내고는 여자를 바라보더니 볼품없음을 힐난한다. 사진 속 남자는 그 때 분명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모습은 순간에 박제된 채 사진 속에 머물러 있건만 남자의 마음만 공연히 싱숭이다 애꿎은 사진 귀퉁이를 탓하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시간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저, 남자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그녀를 바라보려니 과거의 어떤 성취감마저 도둑맞았단 생각이 든 것이다. 저가 가졌고, 저가 훔쳤으면서, 저가 후회한다. 시점을 바꾸지 못했기에, 그저 순간을 타인의 시선으로 담아 제 기억만 덧씌웠기 때문에 저 없는 여인의 모습에 흠결이라도 내야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인연에 대한 후회감을 씻어낼 수 있으리라는 자기방어적 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손바닥 소설, <사진>은 어쩌면 스물한 살 대학생 시절 자신과 미래를 약속해놓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린 첫사랑 약혼녀 이토 하쓰요에 대한 후회와 원망이 묻어난 고백이 아니었을까. 아마 신문에 실린 남자의 사진을 바라본 여자의 시선은 지구돋이의 관점과 동위선상에 놓여 낯선 기억을 재구성해보곤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을지 모른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달의 이면엔 매우 많은 크레이터(구덩이)가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 NASA는 달에 대한 보다 세밀한 관측을 위해서 지난 2009년 LRO(Lunar Reconnaissance Orbiter, 달궤도정찰위성)를 발사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 이 사진은 지난 2015년 LRO가 달 표면 측정 중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 NASA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달의 이면엔 매우 많은 크레이터(구덩이)가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 NASA는 달에 대한 보다 세밀한 관측을 위해서 지난 2009년 LRO(Lunar Reconnaissance Orbiter, 달궤도정찰위성)를 발사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 이 사진은 지난 2015년 LRO가 달 표면 측정 중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 NASA


달은 우주의 모든 ‘위성’을 대체하는 우리말로 통용된다.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을 놓고 “타이탄은 토성의 달이다”고 쓰는 우리식 표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행성의 위성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달’의 이미지를 씌워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세상엔 많은 달이 있지만 지구의 달은 오직 하나, 하나뿐이다.

변해가는 달의 형태와 한결같은 달의 표면을 지켜보는 인류는 그 항상성과 가변성에 많은 심상을 투영하지만 달은 오로지 온전한 지구의 단면만을 묵묵히 응시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이라 했던가. 젊은 날의 과오로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음까지 지켜 끝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기다림을 참지 못한 남자의 미욱함은 지구의 영롱함만큼이나 유한함을 오롯이 담아낸 지구돋이 속 지구와 많이 닮아있다. 달은 오늘도 밝게 지구를 비출 테고, 우린 그달을 응시하며 무수한 상념에 젖어 들겠지만.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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