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만 남은 '정구호식 젊은 휠라'
부사장 영입 1년4개월만에 사퇴
브랜드 혁신 진통으로 기존 고객 유출
[아시아경제 임혜선 기자]"디자인과 제품라인 개선으로 글로벌 브랜드 명성을 되찾겠다."
지난해 10월 열린 휠라코리아 기자간담회에서 정구호 디자이너(사진)는 이같이 공언했다. 정 디자이너는 김진면 휠라코리아 사장이 지난해 5월 말 '삼고초려' 끝에 모시고 온 히든카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 디자이너의 실력과 위상은 패션 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활동했다. 1997년 본인의 이름을 건 패션브랜드 구호를 론칭한 이후 입소문을 탔다. 2003년부터 삼성물산패션부문(옛 제일모직)에서 일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2013년 삼성을 나온 뒤 동종 업계인 휠라 부사장으로 갔을 때도 거물급 인사의 이동은 화제가 됐다.
업계는 '정구호표 젊은 휠라'의 탄생을 점쳤다. 내부 직원들의 기대감은 더욱 컸다. 급변하는 트렌드에 대응하지 못하고 이미지가 노후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던 차에 그의 영입을 신의 한 수로 여겼다. 실제 그는 리뉴얼 작업을 거쳐 휠라를 자신만의 디자인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리뉴얼 과정에서 스포츠 브랜드 정체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면바지 종류, 여성용 토트백 등도 없앴다. 그는 세 번의 시즌을 통해 휠라의 색깔을 완전히 바꿔 놨다.
하지만 정구호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되레 기존 충성고객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기존 휠라 이미지를 좋아했던 40~50대 고정층은 대거 이탈했다. 서울 외 지역에서 수요가 높았던 액세서리와 바지를 없애면서 지방 고객들도 빠져나갔다. 유입하려던 20~30대 고객도 특색 없는 디자인에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아재' 고객도, 젊은층도 흡수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휠라가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내놨다. 실제 이 같은 상황은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올해 1~6월 휠라코리아 매출액은 377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159억원)보다 약 10% 줄었다. 영업이익은 311억원으로 41% 감소했다.
'혁신'을 진두지휘한 정 디자이너는 휠라에 합류한 지 1년4개월 만에 책임을 뒤로하고 돌연 사퇴했다. 회사 측도 지난달 30일부로 그와의 계약을 종료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휠라는 정 디자이너를 영입하기 전까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두지 않았다. 새 직위는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이 고루한 브랜드 이미지를 탈피하고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쇄신에 나서면서 시도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윤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적자를 보더라도, 제품을 혁신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선포, 김 사장과 정 디자이너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한발 물러섰다. 첫 시즌이 끝나고 실적이 악화되자 일부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잡음도 들렸지만 정 디자이너에 대한 윤 회장의 신뢰는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그의 계속된 대외활동이 이번 사퇴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 디자이너는 패션 분야뿐만 아니라 영화 아트 디렉팅부터 무대 의상ㆍ연출가로서도 창의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윤 회장은 정 디자이너가 서울패션위크 총감독 등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하지만 그가 현대홈쇼핑과 협업해 내놓은 '제이바이'를 론칭하자 사단이 났다는 것. 회사에 소속된 임원이 본인의 브랜드를 내놓고 이익창출 활동을 했다는 게 문제가 됐다는 후문이다. 더욱이 휠라와 달리 그가 내놓은 제이바이는 4회 방송 만에 120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이는 현대홈쇼핑 사상 최단 시간 판매 기록 경신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리뉴얼한 휠라코리아 브랜드가 안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 디자이너가 본인 브랜드를 론칭하는 등 대외활동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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