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맛을 본 화단의 꽃이 유난히 붉다
허공은 20층 높이
무서움의 눈을 가려 준다
모든 낙화는 기습적이다
순간을 찌른 칼날이 입안에 갇힌다
꽃의 진실을 믿지 않는 나무
향기를 내다 버리는 나무
꽃 피던 순간을 부정하는 나무
제 다리를 잘라 버리는 나무
허공이 접히는 순간
너는 힘을 다해 두려움에 구멍을 냈다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없는 말 사이로
새가 날아간다
날아가고 싶은 마음은 삶에 가까운데
날개가 기억하는 하늘은 너무 멀었다
칼날이 혀를 부드럽게 길들인다
위태로워서 점점 아름다워지는 난간
이젠 끝이라고 외치며 놓아 버린 끝
불안을 비집고 허공이 불쑥 올라왔다
꽃이 떨어진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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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마다 화단이 있고, 그 화단마다 여러 꽃들과 나무들이 있다. 어쩌면 이 시는 단지 저 봄날의 어떤 낙화에 대한 통증을 잘 벼려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참 무서웠다. "피 맛을 본 화단"이라니. 그리고는 문득 '자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 혼자 생각일까 싶기도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말이지 서로 나누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사연들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람들의 소식이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리는데, 시를 읽고도 무엇보다 그런 사건들부터 떠올리게 될 만큼 자살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아파트 화단을 내려다보기가 겁난다. 그곳에 시체가 있을까 봐.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어딘가에도 "힘을 다해 두려움에 구멍을" 내고 있는 이웃이 있을까 봐, 무섭다.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