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ATM)나 CD나 그게 그것 아니냐고? 아니야, 우린 엄연히 달라. 사촌형인 CD보다 한 단계 진화한 게 바로 나라고. CD는 현금인출, 계좌이체, 잔액조회만 가능하지. 하지만 나는 통장을 이용한 거래나 현금ㆍ수표 등의 입금거래, 공과금 수납, 동전 교환까지 가능해. 은행 창구 직원 몇 명이 해야 할 서비스를 나 혼자 척척 해내지. 모씨는 세계금융혁명이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치켜세우기도 했어.
요즘 나는 좀 우울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야. 인터넷이니 모바일이니 하면서 내 쓸모가 없어지고 있대나 뭐래나. 은행이 나를 1년간 운영하면 166만원을 손해본대. 한때는 금융혁명의 총아였는데 지금은 구조조정 1순위인 '애물단지'가 돼 버렸네. 격세지감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사라지는 친구들을 보면 속상하기 그지없어. 내가 1984년 시중은행에 첫 등장한 이후에 친구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 1994년 1145개로, 6년 후인 2000년 1만2793개로 1만개도 뛰어 넘었어. 2014년엔 8만7만274개까지 늘어났어. 하지만 여기까지였어. 1년 후인 2015년 나와 형제들의 숫자는 8만6802개로 줄었어. 올해는 더 줄어들 것 같아. 올 6월말 기준 KEB하나은행의 ATM은 4798개로, 6개월 전보다 76개가 줄었지. 우리은행의 역시 같은 기간 188개가 사라졌어. NH농협은행의 경우 작년 말보다 20개 늘어난 7045개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 역시 맘 놓을 일은 아니다. 올해 사업계획상 감축하기로 된 ATM기가 아직 운영되고 있는 상태서 신규점포에 ATM기가 새로 설치돼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말이야 나 이대로 주저앉긴 싫어. 진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 신한은행이 서울ㆍ경기 등 17곳에서 운영하는 키오스크는 손바닥만 대면 기기에서 새 통장이나 카드가 튀어나오게 돼 있어. 우리은행 은 홍채인식을 이용해 현금카드 등 별도 매체없이 금융거래가 가능한 '홍채인증 자동화기기'도 선보였어.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이은정 기자 mybang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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