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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60살 한국 증시…세계 10위권 '大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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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증권사 첫 출범, 7년 뒤 증권거래소 설립
상장사 16개로 시작해 현재 1900여개 급성장
1989년 국내 최초 1000포인트 시대 열어
2000년 코스닥 탄생 44개월 만에 거래대금 증권거래소 추월


▲1962년 증권거래소 새해 첫 거래 대성황

▲1962년 증권거래소 새해 첫 거래 대성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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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민규 기자] 1974년 김용환 당시 재무부 장관은 김성곤 쌍용C&E 회장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른바 5ㆍ29 특별지시사항을 통해 기업공개를 강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김 장관은 기업공개 촉진 정책의 배경과 목적을 차분히 설명했다. 경제단체들이 기업공개에 호응하도록 유도해 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즉석에서 답변을 피했던 김 회장은 그해 7월8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입을 열었다. 정부 정책에 공감한다는 취지와 자신이 솔선수범해 쌍용양회를 공개하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기업공개 정책이 급물살을 탈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현대 자본시장의 역사도 어느덧 10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순탄치 않은 굴곡의 여정이었지만 경제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눈부신 성과를 이어왔다. 국내 증권시장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정식 출범할 당시 16개에 불과했던 상장사는 현재 코스피와 코스닥을 합쳐 1900여개에 달해 국내 증시는 세계 10위권으로 발돋움했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국내 자본시장은 세계화 추세에서 또 한번 넘어야 할 '큰 산'과 마주하고 있다. 국내 자본시장의 태동과 성장 과정을 짚어보고 급류를 타고 있는 글로벌 자본개방의 시대에 미래 성장을 위한 혜안을 모색해본다.

▲11969년 제1회 증권의날 기념식

▲11969년 제1회 증권의날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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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기=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적인 증권시장은 1911년 4월 유가증권현물문옥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증권업매매업자들에 의해 설립됐다. 조합원들이 거래일마다 일정한 장소에 모여 조합의 매매규칙에 따라 증권을 거래했으나 일부 조합원들의 투기거래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해산됐다. 이 조합은 1919년 재조직돼 1920년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이 개설될 때까지 이어졌다.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인가된 최초의 조직적 증권시장이었다. 이어 1932년 조선취인소가 설립됐고 1943년 7월 조선증권취인소로 승계됐다. 조선증권취인소를 설립한 포고령은 증권거래에 관해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최초의 실효법이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지만 열강들의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50년 발발한 6ㆍ25전쟁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진정한 해방을 맞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김경배 금융투자협회 본부장은 "1946년 군정명령 제43호에 의해 일제 강점기 시절 증권시장 역할을 했던 조선증권취인소가 폐쇄됐음에도 국내 증권계 인사들은 내국인 소유주식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주식을 수집하고 상호 간에 매매를 통해 증권시장 부활을 꾀했다"며 "일제 때 증권계에 종사했던 송대순ㆍ조준호ㆍ김광준ㆍ김주묵 등 인사들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산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40여명을 규합해 1947년 서울 남대문로2가 소재 지요다빌딩(현 하나은행 본점) 지하실 식당에서 증권구락부를 결성하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 이사장에는 구 조선증권취인소에서 활동했던 송대순 씨가 선임됐다. 증권구락부는 첫 사업으로 증권거래소를 개설하려 했으나 정치ㆍ사회적 혼란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은 1949년 11월 대한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해 송대순 이사장을 사장으로 선임했고 회원 대부분이 대주주가 되면서 증권구락부는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우리나라 첫 증권사가 출범한 순간이었다.

이후 1952년 고려증권, 1953년 영남증권ㆍ국제증권ㆍ동양증권 등이 면허를 취득하면서 증권사들의 설립이 이어졌다. 또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자본시장 발전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가 1954년 3월18일 윤인상 재무부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증권거래소 및 증권시장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거래소 설립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56년 2월29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서울증권시장 개설 인가를 받음으로써 거래소 설립 및 증권시장 개설에 필요한 법적 절차가 완료됐다. 그러나 열악한 국내 경제 상황으로 인해 1956년 3월3일 증권시장 개장과 함께 거래된 상장주식은 경성방직 등 16개사에 불과했다. 초기 증권시장의 거래는 국채가 주도했다. 주식 대비 국채 비중이 8대2 정도로 우세했다.

▲1973년 12월 신주 청약을 하고 있는 투자자들

▲1973년 12월 신주 청약을 하고 있는 투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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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ㆍ성장기= 1960년대 들어 증권시장이 주식시장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제도 미비나 운영 미숙 등으로 1962년 5월 증권파동을 겪게 된다.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매매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주가 폭등 및 대규모 거래가 이뤄졌으나 매수 측의 결제자금 부족으로 월말 결제를 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시장의 기능이 마비되고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증권시장은 장기 휴장을 맞으며 국민들로부터 불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회원사도 5월 파동 당시 60개에서 1968년 25개로 줄었다. 연간 거래량도 100억원에 미치지 못했다.

자본시장을 되살리기 위해 1968년 12월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증권시장 성장의 발판을 다지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행시장은 여전히 부진했다. 주식 공모 실적은 1968년 고작 2건에 1억6000만원으로 미미했고, 이듬해인 1969년에는 실적이 늘긴 했지만 12건에 22억1100만원 정도에 그쳤다.

1970년대 들어서는 더욱 부진한 공모 실적을 보였다. 1970년 9건에 20억6800만원, 1971년 4건 8억5000만원, 1972년 6건 9억5500만원 등으로 위축됐다. 이처럼 부진한 시장을 살리기 위해 정부는 1972년 12월 상장법인에 대한 법인세 혜택 등을 담은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듬해인 1973년 기업공개 건수는 35건으로 증가하며 일종의 붐을 일으켰다. 덕분에 상장사 수도 1972년 66개에서 1973년 104개로 늘었다. 상장회사협의회도 이때 설립됐다.

증권시장 규모도 급속히 확대돼 상장자본금은 1968년 966억원에서 1973년 2516억원으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거래대금도 200억원에서 1600억원으로 8배 늘었다. 하지만 국내 증시는 세계 석유파동의 여파로 1973년 하반기부터 다시 침체기를 맡게 된다.

▲공모주가 고수익·무위험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청약 때마다 증권사 주변에 투자자들이 장사진을 이룬 모습(1975년 6월)

▲공모주가 고수익·무위험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청약 때마다 증권사 주변에 투자자들이 장사진을 이룬 모습(197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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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ㆍ성숙기= 1980년대 들어 추락하는 한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 경제 호황과 저금리ㆍ저달러ㆍ저유가 등 3저 효과가 맞물려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경상수지 흑자시대가 열리면서 장기 침체에 시달리던 증권시장도 활성화 바람을 맞게 된다. 실제 1985년 가을을 전환점으로 국내 증시는 상승세로 돌아섰다. 상승 폭은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종합주가지수가 1985년 139에서 1989년 4월1일 1007로 무려 7배가 넘는 성장을 기록하며 국내 증시 최초로 주가지수 1000포인트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격언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증시는 1989년을 고비로 하락세로 돌아서며 연초에 비해 9포인트 하락한 909로 장을 마감했다. 1983년을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9년 하반기 들어 노사분규가 확대되고 과소비 풍조 및 저축률 저하가 나타나면서 경제환경은 더욱 어려워졌다. 1990년 7월17일에는 종합주가지수가 566.27까지 떨어졌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는 국내 증권시장에도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1997년말 종합주가지수는 376포인트라는 참담한 성적을 보이면서 막을 내렸다. 연초 대비 42.4% 하락한 것이다. 이는 1980년 이래 최대 하락 폭이었다.

김경배 본부장은 "당시 증권사들도 구조조정 태풍을 맞았다"며 "국내 증권사는 1997년말 36곳 중 7곳이 폐쇄되고 3곳이 합병됐다"고 말했다. 고려증권이 1998년 6월 문을 닫았고 동서증권도 같은 해 12월 증권업 허가를 자진 반납했다. 1999년에는 한남투자증권ㆍ장은증권ㆍ동방페레그린증권 등 3개사가 폐쇄됐다. 2000년 삼성증권이 삼성투자신탁증권을 합병했고 2002년에는 브릿지증권이 일은증권을, 신한증권이 굿모닝증권을 각각 합병했다.

코스닥시장은 외환위기 이후 경제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코스닥 등록법인 수는 1998년 331개에서 1999년 457개로 급증했다. 특히 2000년 2월에는 거래대금이 4조8789억원으로 거래소 거래대금을 추월하기도 했다. 코스닥시장 탄생 44개월 만에 45년 역사의 증권거래소 거래대금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 나스닥이 뉴욕증권거래소 거래대금을 넘어서는 데 28년이 걸린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을 보인 것이다.

◇미래성장= 그동안 한국 자본시장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거래대금과 시가총액 등 양적인 면에서 세계 10위권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최근 코스피가 1900선이 무너지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증권산업과 자본시장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객서비스 강화는 물론 강도 높은 내부 경영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금투업계 관계자는 "2009년 시행된 자본시장법은 국내 자본시장의 재도약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며 "이제는 업계가 힘을 모아 대형화 및 전문화를 추진하고 전문 인력 양성과 국제화에 힘써야 할 시기"라고 제언했다.




박민규 기자 yush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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