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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40년] ①마흔해, 결단과 영광의 기억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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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반도체 인수와 2.8 도쿄선언

[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 2014년 12월 6일, 삼성과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의 싹을 틔운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삼성이 주력으로 내세운 수많은 사업 가운데서도 반도체는 빼놓을 수 없는 사업이다. 10년전 삼성 반도체 30주년 당시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기흥 사업장을 찾아 임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신화 창조!!'라는 기념 서명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 회장의 염원이 통했기 때문일까? 이후 10년 동안 삼성 반도체는 매년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내고 있다. TV 하나 제대로 조립못하던 시절, 첨단 기술의 불모지, 미국과 일본의 기술 종속국에 불과했던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전자 강국으로 자리잡고 삼성전자가 스스로 '초격차'를 자신할 만큼의 기술력을 쌓아온 배경에는 반도체가 있다.
지난 40년간의 삼성 반도체 역사에는 눈물과 서러움, 좌절과 실패, 성공과 자만을 거쳐 세계 최고의 강자가 된 한편의 드라마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삼성 반도체 역사의 시작 1974년 12월 6일= 1974년 초 한국반도체가 설립됐다. 국내 반도체 산업이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조립하청 역할에 불과하던 때다, 한국 반도체는 직접 웨이퍼를 가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공장 문을 채 열기도 전 부도 위기가 왔다. 이 소식을 듣고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나섰다.

고 이병철 선대 회장과 비서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야 말로 우리나라가 꼭 해야 할 사업"이라며 사재를 털어 부도 위기의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샀다. 1974년 12월 6일, 지금부터 꼭 40여년 전의 일이다.
10년전 이 회장은 '삼성 반도체 3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해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소회했다.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경영진들이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너무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나 기업이 앞으로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 산업 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했다."

이 회장의 과감한 투자로 부도 위기를 넘긴 한국반도체는 목표로 했던 전자시계용 반도체 개발에 성공한다. 초기에는 수출실적도 올리고 월 단위 흑자전환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반도체 종주국 미국에 일본이 도전하며 반도체 가격이 급락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한국반도체에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전반적인 기술 부족도 큰 문제였다.

◆한국반도체 합병= 1977년 이병철 선대 회장은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지분을 사고 삼성반도체를 출범시켰다. 규모도 크게 늘렸다. 원진그룹이 사업 시작전에 포기한 용인 공장과 설비를 인수하고 영등포 구로 공단에 위치한 미국 페어차일드의 반도체 조립공장도 함께 인수했다. 반도체 사업에는 구원투수가 필요했다. 이 회장이 선택한 인물은 삼성 반도체의 초석을 쌓은 김광호 전 부회장이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을 만나고 온 강진구 사장이 부르더니 삼성반도체 반도체사업부장으로 발령을 냈다. 공장에 갔더니 직원 1000여명이 할 일이 없어 풀을 뽑고 있었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삼성반도체는 삼성 내에서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회사였고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이대로는 안된다는 보고서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김 전 부회장의 회고처럼 반도체 사업은 삼성의 골칫거리로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봄 이병철 선대 회장과 막역하게 지내던 일본인 이나바 박사가 도쿄에 체류중이던 이 회장을 찾아왔다. 이나바 박사는 일본 산업계의 새로운 조류와 관련해 이 회장과 깊은 토론을 나눴다.

일본 산업계는 제철, 조선, 석유화학, 섬유 등 기간산업이 과당경쟁으로 인해 망가지고 있었다. 그 대안이 고부가가치의 첨단기술 분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반도체가 그 중심에 있었다. 한국 역시 일본이 걸어간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첨단기술 분야로 한시바삐 산업의 축을 변화시켜야 했다. 이 회장은 당시 심경을 자서전 '호암자전'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80년 이 회장은 삼성반도체를 삼성전자로 합병했다. 이후 1982년에는 한국전자통신으로 합병시키며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했다.

◆2.8 도쿄 선언= 1983년 2월 8일 이병철 선대 회장은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본격 진출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결심했다. 이른바 '2.8 도쿄 선언'이었다. 반대가 빗발쳤다. 컬러TV 생산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최첨단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삼성 내부서도 "반도체 사업은 1억 인구 이상, GNP 1만 달러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은 돼야 가능한 사업인데 삼성은 이 중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재계 역시 "삼성이 큰 실수를 하고 있다. 3년도 못가 실패할 것"이라며 냉소했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회장은 오히려 속도전에 나섰다.

기흥에 터를 닦고 반도체 공장을 세우는 동시에 미국 마이크론과 기술 제휴를 통해 64K D램을 6개월 안에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반도체연구소장을 담당했던 이윤우 상근 고문(전 부회장)의 회고다.

"미국, 일본과의 기술 격차가 당시 10년에 가까웠다. 10년의 세월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속도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기흥에 공장을 세우고 반도체를 공부한 우수 인재들을 직접 영입하러 다녔다. 권오현 부회장, 김기남 사장, 조수인 사장, 전동수 사장 등 현 삼성그룹 전자계열사들의 주요 CEO들이 당시 반도체 사업 초기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 부회장은 D램 설계 기술을 가르쳐 주기로 한 미국 마이크론에 연수대를 파견했다. 마이크론이 넘겨준 것은 달랑 설계도 한장 뿐이었다. 공정 과정과 설계, 제조기술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다. 어떤 장비를 쓰는지, 어떤 공정을 거쳐 반도체가 만들어지는지를 곁눈질로 배워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연수대 중 한사람이 마이크론의 회사 컴퓨터를 몰래 봤다는 이유로 멱살을 잡히고 쫓겨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설계도 외에는 기술 이전을 할 생각이 없던 마이크론이 이를 구실삼아 연수대 전원을 쫓아낸 것이다.

"설계도 한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심정은 참담했다. 기술이 없다는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이 흘렀다. 설계도가 있어도 64K D램은 만들수가 없었다. 마이크론이 사용하던 장비와 기흥 공장에 마련한 장비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64K D램을 뜯어서 이를 현미경으로 보며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같이 반도체 개발을 진행했던 연구원들은 전원 야전침대를 펴놓고 밤낮없이 일했다. 기술이 없다는 서러움을 자양분 삼아 모든 것을 잊고 개발에만 전념했던 시절이었다."

이 고문의 회고처럼 서러움을 곱씹고 눈물을 마셔가며 107명의 반도체연구소 연구원들은 밤낮없이 일했다. 마침내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다. 6개월만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역시 안된다'는 생각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단순한 기술 이전이 아닌 연구팀이 직접 64K D램을 개발하며 미국, 일본에 뒤처진 기술력 격차도 한층 좁힐 수가 있었다.

1985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수출 1억달러를 달성했다. 64K D램으로 인한 성과였지만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1000억원을 넘어섰다. 1986년에는 TI를 비롯한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 일본과 삼성을 상대로 대규모 소송을 벌였다. 반도체를 만드는 원천 기술로 소송을 걸다 보니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1986년 삼성이 반도체로 번 수익의 80%가 넘는 85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내야 했다. 여전히 반도체는 미운오리새끼였다.

다시 이 부회장의 회고다.

"1987년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이병철 선대 회장이 기흥에 3라인을 준공하라고 지시했다. 1, 2라인 공장 가동률도 50%에 못미치고 수천억대 적자가 쌓였는데 또 공장을 지으라는 지시를 차마 따를 수 없었다.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대 회장의 전화가 왔다. 내일 기공식에 참석할테니 준비를 해달라는 전화였다. 부랴부랴 기공식을 마련했는데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다."

3라인 기공식은 이 회장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됐다. 지병이 도진 이 회장은 병석에서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11월 타계했다.




명진규 기자 ae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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