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다.
너, 나하고 살래? 그렇게 물을 때의 '산다'는 것은, 죽는다의 반대쪽에 있는 말 이상으로 적극적인 어떤 선택을 품고 있다. 우리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바닥을 밟고 서서도 강하고 당찬 삶을 산다. 그 사는 일이, 나 하나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 그것이 어느 기간 동안 내 삶의 전체를 이루는 그때, 우린 너와 '잠시 살았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전에도 살았고 그 이후에도 살았지만, 네가 있어야만 되는 나의 삶. 네가 있어야 숨쉴 수 있고 네가 있어야 꿈꿀 수 있던 삶. 우리 삶 중에는 그런 부분도 있는 게 아니던가.
사는 것은 터전의 문제이다. 서러운 셋방살이도 셋방에 들어앉은 삶이다. 타향살이는 타향 언덕에 등 뉘고 자는 사람의 삶이다. 군대살이는 스스로의 뜻과는 비교적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징집되어 총검을 닦는 내무반에서 모포를 덮고자는 바로 그 삶이다. 시집살이는 뭐던가. 한 남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에 딸린 집 전부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옛 여자의 조건들이 아니었던가. 뒷방살이는 가정이나 조직의 실력자 자리에서 밀려나 눈치 보며 살아야 하는 서러운 말년의 삶이다. '터전'을 붙인 '살이'들은 왜 이리 서럽고 고단한가. 어려운 터전에서 살아내야 하는 그 숨차고 힘겨운 기분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말은, 너와 살았다는 말이 담은 의미를 또렷이 환기시켜준다. '너'는 바로, 어느 기간 동안의, 나의 터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를 집 삼아, 둥지 삼아, 혹은 언덕 삼아, 기둥 삼아 그렇게 살았다. 너는 바로 나의 집이었다는 사실. 그것이 '함께 살았다'의 의미가 아닌가. 이 생각만 하면 다른 살이에 못지않은 서러운 감회가 떠밀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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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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