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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스포츠 팀 하나를 사랑하는 일=식성(食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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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스포츠레저 부장

허진석 스포츠레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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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86년 동안 한 곳에 고정됐다. 펜웨이 파크(Fenway Park). 미국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이며, 레드삭스 팬들의 성지(聖地)다. 1919년, 두 소년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야구장에 간다. 그날 이후 그들은 레드삭스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소년들은 청년이 됐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 여전히 펜웨이 파크. 청년들은 중년이, 다시 노인이 됐다. 아들과 손자가 그들 곁을 지킨다. 카메라는 2004년에 멈춘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포츠 용품업체의 카피가 뜬다.
'저스트 두 잇'.

이 오래된 텔레비전 광고의 시간적인 배경은 1919년부터 2004년 '월드 시리즈' 직전까지다. 레드삭스의 암흑기, '밤비노의 저주(Curse of Bambino)'에 사로잡힌 시기다. 저주는 1920년에 시작된다. 훗날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아버린 것이다. 최초의 월드시리즈(1903년) 챔피언 레드삭스는 1918년 다섯 번째 우승을 마지막으로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우승하지 못했다. 대신 양키스가 전설을 써나갔다.
레드삭스는 1946ㆍ1967ㆍ1975ㆍ1986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패했다. 이들을 사로잡은 저주는 2004년에야 풀린다.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승무패로 제압했다. 기둥투수 커트 실링이 다친 발목을 피로 물들인 채 역투했다. 거포 데이비드 오티즈는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드루 베리모어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는 이때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다. 레드삭스는 이후에도 두 번(2007ㆍ2013년) 더 우승했다.

이 광고를 보면서 목이 메었다. 아버지를 따라 펜웨이 파크를 찾은 두 소년이 늙어가는, 그리하여 그들의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고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스토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감정이입. 나의 마음이 펜웨이 파크에 가 있었다. 늙어가는 내가 그곳 어디에 앉아 응원하는 팀의 성공을 기원했다. 아들과 손자가 마음을 합쳐 나와 함께 응원했다. 그러나 백일몽일 뿐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당연히 서울 팀을 응원한다. 그러나 아들에게 나의 팀을 상속하지 못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서울운동장(오세훈씨가 서울시장을 하던 시절에 헐어 버린, 마지막 이름은 '동대문운동장'이었던) 야구장을 들락거리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가 된 뒤 오랫동안 야구장에 가지 못했다. 스포츠 기자에게 야구장은 출입처일 뿐이다. 아들은 외삼촌과 함께 야구장에 갔다. 한때 타이거즈의 모기업에서 일한 처남은 잠실에서 경기가 열리면 응원하러 갔다. 처남이 내 아들과 함께 응원할 때마다 타이거즈가 승리했다. 아들은 타이거즈의 팬이 됐다.
스포츠 팀에 대한 기호는 식성(食性)을 닮았다. 그리고 사나이의 입맛은 아버지를 닮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식성에 따라 간을 맞추고 재료를 정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갈비 뜯는 법과 냉면 먹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는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었다면, 나를 데리고 MBC 청룡을 응원하러 갔을 것이다. 내 주변에서는 아들이 나를 빼닮았다고 한다. 나는 아들을 양식당에 데리고 다녔고, 동해에 가서 회를 먹였다. 가끔 낚시를 함께했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일대일로 농구를 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녀석을 안고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호주의 대통령배국제축구 결승전도 함께 보았다. 하지만 야구는 그러지 못했다. 아들을 뺏긴 기분에 가끔 사로잡힌다.

그래도 감사할 일은, 아들도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아들은 야구 정보에 빠삭하고, 해외축구 경기가 열리는 주말이면 거실에 드러누워 함께 중계방송을 본다. 물론 아들은 내가 응원하는 야구 팀의 줄무늬 저지(jersey)를 절대 입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함께 경기장에 갈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희망한다. 혹시 손자가 생긴다면, 그 녀석은 제 아비와 같은 팀을 응원하기를. huhball@
허진석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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