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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타기'의 어제와 오늘…"윤진숙은 왜 그날 해임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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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인간의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주어진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선별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정보가 쏟아질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건, 이슈가 터지면 관심은 새로운 사안으로 옮겨간다. 세상을 이해하는 눈 역할을 하는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의제설정(어젠다세팅) 기능을 하는 언론마저 새로운 소식을 찾아 움직이면 사람들의 관심사는 중력과도 같이 옮겨가게 된다. ‘물타기’가 가능해지는 순간이다.

물타기는 주식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주가가 하락할 경우 떨어진 가격에 주식을 추가로 매입해 평균 구매 단가를 낮추는 매수기법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현상에서 말하는 물타기는 이와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특정한 사건이 터졌을 경우 사람들의 시선을 뺏을 수 있는 또 다른 사건을 터뜨려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물타기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은 아니다. 연예인들의 마약사건이나 도박 등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 결과를 공표만 하면 세상의 관심사가 몰리는 일들이 정국 현안을 덮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터졌기 때질 때마다 물타기 의혹이 제기됐다. 연예인의 급작스런 이혼, 열애설, 성추문 등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점은 터지면 그 일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는 점이다. 지난 2011년 서태지와 이지아의 비밀결혼과 이혼소송 당시 BBK 관련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연예인들 이야기만 물타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발생한 사건의 부차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서 본질적인 측면을 감추는 것이다. 1991년 6월 정원식 전 국무총리 서리가 외대에 강연에 갔다 나왔을 때 학생들이 계란과 밀가루를 투척한 사건이 있었다. 그해 4월에 명지대 경제학과 1년 강경대씨가 시위 중 전경에게 맞아 숨진 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이 분신하며 정권에 맞서던 시기였다. 학생들은 이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전교조 교사 집단 강제 해직 등에 항의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이들은 '스승도 몰라보는 패륜아'가 됐다. 대학생들이 스승에게 계란을 던진 이유 따위는 고려되지 못한 채 ‘패륜 논란’만 남았다. 이 사건은 운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찬물을 끼얹으며, 정권을 위협했던 분신정국을 끝내 버렸다.

13일 무죄판결을 받았던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1991년 5월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던 김기설 씨가 분신 후 투신해 사망하자, 검찰은 김 씨의 죽음 뒤에 배후가 있다고 밝혔다. 당시 검찰은 김 씨의 주변인물들의 필적 검사를 실시하고 그 중 가장 필체가 비슷했던 강기훈 씨를 유서대필과 자산방조혐의로 사법처리했다. 불의에 항거하며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들의 뜻은 의심받게 됐다. 당시 정권에 맞섰던 운동권은 결국 누군가의 말처럼 '죽음을 부추기는 세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강 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법원의 재심을 통해 23년만에 확인 됐다.
최근에도 물타기설이 제기되는 사건이 제기된 사건이 있었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해임이 그것이다. 윤 장관은 지난 6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해임건의를 박근혜 대통령이 수용하면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날 정 총리는 국회에서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응답을 했었는데 오전과 오후의 입장이 크게 달라졌다.

정 총리는 오전 대정부질의 당시에는 윤 전 장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김동철 민주당 의원이 윤 전 해수부 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으며 해임건의안을 낼 생각이 있는지를 묻자 "제가 사과를 드렸지만 일부 말실수나 이런 것으로 인해서 국민에게 상처를 드린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성을 하고 본인도 잘못했다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일로 해서 해임건의까지 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저는 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평소의 정 총리의 조심스러운 언행을 감안하면 해임건의안을 제출할 뜻이 없음을 밝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오후 4시 반쯤 정 총리의 태도는 강경해졌다.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이 재차 윤 전 장관의 해임건의가 필요하다고 밝히자 "대통령께서 얼마 전에 이미 유사한 사례로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언행이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저도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을 하고 해임건의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오늘 사실 깊이 고민하고 있는 중 입니다"라고 말했다. 몇 시간만에 '해임건의할 일인지 모르겠다'에서 '깊이 고민하고 있다'로 바뀐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정 총리의 오전 답변과 오후 답변 사이였던 오후 2시에 중요한 재판결과 하나가 나왔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관련 '경찰의 수사 결과 은폐·축소' 혐의를 받아 온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아마도 이날 윤 전 장관 해임이 없었다면 대다수 방송의 메인 뉴스는 김 전 청장 무죄 사건을 다뤘을 것이며 다음날 신문들 역시 김 전 청장을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 또한 크게 몰렸을 것이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이 저녁에 전격적으로 해임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실제 이날 지상파 3사의 메인뉴스(KBS 뉴스9,MBC 뉴스데스크, SBS 8 NEWS)를 살펴보면 윤 전 장관의 해임 소식이 김 전 청장의 무죄소식을 제쳤다. KBS 뉴스 9의 경우 6번째와 7번째에 윤 전 장관 해임 소식을 다뤘고 이후에 김 전 청장 무죄내용 1꼭지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전망 내용 1꼭지를 보도했다. MBC의 경우에도 첫번째와 두번째 윤 전 장관 소식을 2꼭지로 나눠 전한 뒤 김 전 청장 무죄내용을 1꼭지 보도했다. SBS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김 전 청장의 무죄 1꼭지, 정치권 반응 1꼭지, 윤 전 장관 해임 관련 1꼭지를 다뤘을 뿐이다. 이같은 모습은 7일 조간신문에서도 그래도 반복됐다.

뉴스의 흐름이 김 전 청장 무죄에서 윤 전 장관 해임으로 바뀐 것이다.

이를 두고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김용판이 윤진숙을 잡는다"며 "전형적인 시선분산 물타기"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문제제기는 지난해 말에도 있었다. 지난해 12월22일 오전 민주당, 정의당, 안철수 무소속 의원 등은 '범정부적 대선개입 사안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범야권이 한 목소리를 낸 이 기자회견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도록 일요일 오전 11시를 골라 진행됐다. 일요일과 월요일 오전 신문 등에서 크게 다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날 특검법 발의는 세상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날 9시와 10시 사이에 경찰이 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민주노총 본부 사무실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설립 이래 최초로 경찰의 공권력이 강제 진입한 것이다. 세간의 관심이 여의도에서 민노총 사무실이 있던 정동으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진압이 벌어짐에 따라 이날 하루종일 뉴스들은 온통 실시간으로 당시 상황을 중계하기에 바빴다.

당시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 없이 민주노총 사무실에 진입했는데, 단지 체포영장만 가지고 건물을 파손할 수 있는지를 두고서 법적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형사소송법에 어긋나는 무리수라는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법야권의 특검 발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날 한 국회의원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특검법에 몰리는 세간의 관심을 덮기 위해 정부가 철도노조 지도부 체포라는 이름으로 민주노총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의 해임 시점이나 민주노총 사무실에 대한 경찰 진입은 우연히 비슷한 시점에 발생한 일일 수 있다. 정 총리는 야권에 이어 여권까지 나섬에 따라 윤 전 장관을 더 이상 보호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경찰은 민주노총을 강제진입해야만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타기’ 의도 때문에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진실은 몇몇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특정한 이슈를 터뜨려 다른 이슈를 덮으려는 누군가의 '물타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어져 나갈 때까지 안 놓는 진돗개 정신'을 가진 시민들과 언론의 양식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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