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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휴대전화에 빼앗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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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가을이었다.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낸 친구가 시인을 찾아왔다. 친구는 한 여자를 좋아한 지 오래 됐는데 그 여자는 자신을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친구는 시인에게 여자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시인은 여자를 만나 친구의 마음을 알려줬다. 친구가 얼마나 성실한지 칭찬했음은 물론이다. 여자는 양친이 모두 아프셔서 남자를 만날 처지가 못 된다고 말했다. 언젠가 집안이 평안해지면 만날 뜻이 있다고 답했다.
시인은 친구에게 여자의 말을 전하고 큰 턱을 얻어먹었다. 가끔 친구에게 그 후의 일을 물었다. 친구는 여자의 하숙집 근처를 거닐고 가끔 전화를 하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친구는 여자의 가족이 방문하지 않는 시간이나 여자가 집에 없을 만한 시간에도 전화를 한다며 웃었다.

받지 않을 전화 걸기를 의아하게 여기던 마종기 시인은 나중에 시 '전화'에 친구의 마음을 담았다.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
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
에서 보내는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후략)

다들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곁에 두는 이 시대, 이 시는 어색해진다. 말하자면 '당신이 휴대전화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건다'는 상황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 휴대전화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까? 전화를 받지 않아서? 전화를 받지 않는 건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일 지도 모른다. 이 경우 전화 수신음이나 음악은 그 사람의 곁이 아니라 다른 엉뚱한 곳에서 울리게 된다.

휴대전화가 유선전화를 대체하면서, 이 시에 공감할 생활문화적인 바탕이 사라져버렸다. 편리해지긴 했는데 잔향이랄까, 여운이랄까, 그런 그윽함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다.

여자의 빈 방을 자신의 마음으로 가득 울리곤 하던 친구와 그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 얘기는 마종기 시인의 시작(詩作) 에세이집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에서 직접 읽으시길.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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