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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시리즈] 초동여담 - 말이 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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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아시아경제에서는 추석 명절을 맞아 그간 기사화된 기획 시리즈 중 일부를 엄선하여 독자 여러분께서 한눈에 보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안전한 귀성·귀경길 되시고 풍성한 한가위 맞으시길 빕니다.

① 신(神)은 생각하였다. 이 사나이를 말로 만드는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인간들의 사소한 농담까지도 신의 세상에서 얼마나 정밀하고 심각한 인과관계로 풀어내고 있는지 현실로 보여줌으로써,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인간의 가벼움에 대응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신문사 편집기자 마(馬)군이 말이 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는 밤참을 먹고 있었다. 최근 그는 중요한 지면을 맡아 일하고 있었기에 야근이 잦았다. 그날도 야근을 하고 맥주 한잔을 걸친 뒤 퇴근했다. 여느 때처럼 출출함을 느낀 그는 아내를 채근하여 차린 라면을 먹으면서 목 뒤로 송알송알 솟아오르는 땀을 느끼고 있었다. 땀이 흐르는 러닝셔츠의 뒷쪽을 살짝 들어올렸다. 목 뒤가 심각하게 가려워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별 이상은 없는 듯 했다. 그런데 엉덩이 쪽에선 무엇인가 돋아나오는 느낌이었다. 상황은 매우 입체적으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워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았다. 목 뒤에서 갈기털이 솟아나오고 턱이 길쭉해지더니 얼굴이 말상으로 바뀌어가고 몸이 마구 부풀어 거대한 몸집이 되어갔다. 하나의 변화가 완성되었을 때 그는 의식만 인간인 채 완벽한 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곁에서 같이 라면을 후룩이고 있던 아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외양이 얄궂게 변해가는 동안에도 자신의 대리인같은 한 사내가 여전히 아내 옆에 앉아서 라면을 후룩이며 먹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급속도로 그에게서 빠져나가 말이 되었다. 대신 자신의 허풍선이 하나가 아내를 안심시키려 자신의 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그는 말발굽을 내저어 아내를 일깨우려 했지만 말이 된 자신의 몸은 아내에게 전혀 보이지 않는 듯 했고 그녀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말이 된 그가 그녀 곁에 머물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2분 정도였다. 갑자기 그의 몸은 아주 빠른 탈 것 위에 놓인 몸처럼 귀가 멍멍하게 이동하더니 과천 경마장의 어느 말의 몸과 바꿔치기를 하고 있었다.

농담이었을 뿐이었다. 아무도 그가 진짜 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동료들과 조간신문을 펼쳐보다가 마사회와 관련된 기사를 보고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을 뿐이다.

"나도 마사회에 취직했더라면 지금쯤 아무 생각없이 살 수 있을 텐데... "
그는 5년전쯤 자신에게 다가왔던 멋진 기회를 놓친 것을 애석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읽고 있던 그 기사는 마사회 일부 직원들의 비리에 관한 기사였는데 그에게는 그 비리의 비릿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고, 돈냄새 풍기는 생태계에 대한 느닷없는 동경이 스물거리고 있었다. 장기불황으로 빡빡해진 직장생활의 피로감이 그런 식으로 잘못 분출되고 있는 것이리라.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이우철기자가 마군의 말을 되받았다.

"지금도 마사회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어떻게요? 마사회 수위로?"
마군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자, 이우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아니, 말로 가면 되잖아?"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사소한 농담의 결과가 엄청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농담 속의 언질이 더욱 굳혀진 것은 며칠 후의 술자리였다. 편집부 동료들 간의 술자리였는데 여기에 마침 같은 술집으로 들어온 사진부 몇명이 어울렸다. "오리"라는 별명을 가진 사진부장은 술자리의 뛰어난 분위기메이커였다. 여기서 동료 편집기자 주마등씨는 오리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날짐승과 길짐승이 어울리니 참으로 가축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오리부장은 볼록한 배를 한번 쓰다듬더니 "길짐승은 누군데?"라고 되물었다. "동물적인 후각으로 한번 찾아보시죠." 주씨는 능청을 떨었다. 갑자기 마군의 얼굴이 벌개졌다. 오리부장은 특유의 날렵한 부리를 쳐들어 좌중의 안면을 훑더니 마침 옆에 앉은 마군의 얼굴 쪽으로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바로 너지? 마두(馬頭)."

② 마군을 그간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오리부장의 사건은 그를 완전히 말로 낙인찍는 계기가 되었다. 하필 성도 마(馬)씨가 아닌가. 더구나 그의 고향은 마산(馬山)! 사는 곳은 마두역 근처. 신문제작 일을 마치면 동료들끼리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부서에선 관행처럼 되어있다. 여섯시쯤 되면 삼삼오오 어울려 식사를 하러 간다. 어느 날 마군이 선배 최차장과 여기자 윤에게 같이 식사를 가자고 말했다. 그때 최씨가 문득 이렇게 대꾸한다. "말밥이지." 최씨의 이 말은 유행어의 차용일 뿐이었다. <당연>이 <당근>이 되고 <당근>이 말이 먹는 밥이라 해서 <말밥>으로 되는 과정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썰렁개그다. 그런데 마군에게 적용되자 생생한 은유가 된다. 말밥이라니…. 마군의 얼굴이 씰룩이며 구겨졌다. 박군은 애써 그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딴소리를 한다. "김선배도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러자 윤기자가 슬쩍 거든다. "그래, 그 김기자는 애마(愛馬)부인이니까 같이 가야지."

이튿날 그는 다시 최차장에게 식사를 가자고 말했다. '말밥이지'라는 말이 나올까봐 마군은 콩글리시로 다시 묻는다. "Can you please have a dinner with me?" 최차장의 대답은 이거였다. "Of horse!" 마군이 부아가 나서 소리쳤다. "이제 선배하곤 절대로 밥 같이 안먹을 거유." 최차장의 천연덕스런 대답. "그래, 말은 여물을 먹어야지."

몇 번의 우스개들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말에 관한 상상력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마음(馬音)을 곱게 써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주마간산이잖아?" "제목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네." "말귀가 왜 그리 어둡나?" "말문이 막히네." "잘 하고는 있지만 주마가편을." 이런 '말'장난이 기승을 부리자 동료 하나가 중얼거렸다. "어찌 모든 상상력들이 한 가지로 귀결되남?"

그러자 한 동료. "모든 길은 로마(馬)로 통하니까…." 다른 동료가 받았다. "그것이 우리의 화두(話頭-말머리) 아니겠어?"

이우철 기자는 시가 한편 생각난다고 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곁에 있던 후배도 거들었다. 저는 선배를 보면 시인이 생각나요. 청마(靑馬) 유치환. 언젠가 신문에서 인터넷 댓글 사건이 터졌을 때 한 동료가 물었다. "제수씨 괜찮지? 조심해. 요즘 마녀(馬女)사냥 한다더라."

심형래의 <용가리>가 서울에서 쉬리의 관객동원을 뛰어넘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우리의 마군이 약간 흥분했다. "영화를, 우리 거니까 봐주는 식으로 흥행을 만들어내는 건 말도 안돼요. 알맹이가 있어야지." 이때 이우철이 거든다. "어이, 남의 조상 가지고 용쓸 거 뭐 있냐? 자네 조상으로 승부해봐." "우리 조상?" "그래애… 말똥가리." 낄낄거리며 웃느라 엘리베이터가 흔들리자 한 동료는 말했다. "이놈의 엘리베이터가 인마살상(人馬殺傷)할 뻔 했네."

회사의 공지사항을 담은 문서가 가끔 돌아온다. 우린 그걸 회람이라고 부른다. 휴가 날짜를 조정하라는 회람을 들고 마기자가 소리친다. "공지 안보신 분 안계세요?" 이때 옆에서 툭 내뱉는다. "누가 끝말잇기 좀 해줘."

엉터리 비약도 활개를 쳤다. "오늘 그 제목 잘 달았지만 읍참마속(泣斬馬謖)해야겠어." "으이구, 마속은 사람 이름이우. 마군이 술을 먹으면 무조건 말술." 잔을 내려놓으면 말했다. "대동강수 음마무(飮馬無)." 술을 사양하면 말했다. "말을 물가까지는 데려올 수 있지만 먹일 수야 없지." 마군이 그로기 상태가 되었을 땐 "오늘 대마(大馬)를 잡았다!" "정말 한 선량한 인간에게 마구잡이로 이럴 거요?" 그러자 그동안 잠자코 있었던 이영수 차장이 말한다. "마구(馬狗)잡이? 요즘 복날엔 개말고 말도 잡나?"

아무도 모른다. 지금 연신 말꼬리를 잡히며 괴로워하는 마군이 진짜 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절대로 마각(馬脚)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하느님의 응징을 받아 마사회에서 방금 탈주한 말 한 마리를 놓고 벌이는 우리 부서의 최근의 이지메는 농담이 자아낼 수 있는 아주 심각한 결과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언론은 복마전(伏'馬'殿)이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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