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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꼭 봐!] 기억에 관한 영화…'남영동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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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꼭 봐!] 기억에 관한 영화…'남영동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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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재범 기자]정확하게 1년 전 노장 정지영 감독은 사법부의 부당함을 고발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들고 나왔다. 우리 사회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오작동을 시각화 시킨 노감독의 시선은 세월의 흐름을 비껴나간 듯 펄떡였고 힘이 넘쳤다. 그리고 정확하게 1년이 지났다. 이 노감독의 시선은 기억으로 옮겨갔다. 불과 20년 전 서울시내 한복판 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에 묻힌 기억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남영동 대공분실이라 불린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이다. 송곳처럼 날카롭고 망치처럼 둔중하며 칼날처럼 서슬퍼런 권력에 짓밟힌 기억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 의해 한낱 고깃덩어리로 취급당한 채 말살의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간 시대의 아픔이 또 하나의 기억이다. 영화 ‘남영동1985’다.

‘남영동1985’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고문에 유린당한 몸의 기억이 있고, 머릿속 뇌를 긁어 패어 놓듯 세포 하나하나가 느끼는 고통의 기억도 있다. 그 기억을 영화는 강요한다. 아프면서 고통스러우면서 그 모든 것을 왜 느끼는지도 모르는 이에게 기억나지 않은 기억을 강요한다.
영화 시작과 함께 느닷없이 한 사람이 등장한다. 김종태(박원상)란 이름의 이 사나이는 알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간다. 이유를 모른 채 쏟아지는 구타와 욕설 그리고 모욕감에 그의 기억은 흐려진다. “여기가 남영동입니까”란 한마디는 자신이 당하는 모든 부당함의 이유를 묻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도 기억의 또 다른 이름 아닌가. 무의식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누군가에게 들은 부당함의 하소연을 스스로 기억해 낸 채 ‘이제 내 차례 인가’란 자문자답이자 자포자기의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기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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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에게 쏟아지는 폭행은 기억을 강요한다. ‘쉬는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기억하란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기억은 당하는 김종태의 기억 속 기억이 아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만들어진 기억’이다. 자신들의 머릿속 기억을 다른 이의 입에서 원하는 모순의 현장이 ‘남영동1985’의 겉모습이다. 만들어진 기억을 얻기 위해 그들은 고문이란 간편하면서도 어두운 도구를 꺼내든다.

연출을 맡은 정지영 감독은 이 부분에서 고문이 인간의 기억을 어떤 식으로 재건축하고 또 그 인간을 어떻게 재정립 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고문의 방식은 이렇다. 먼저 텍스트적인 표현방식으로 접근하면 ‘공사’라고 한다. 고문 경찰관들은 영화 속에서 고문을 ‘공사’라고 불렀다. 실제 이 영화의 모티브인 고 김근태 의원의 자서전 ‘남영동’에서도 이 단어는 나온다. 그들에게 고문은 공사라 불릴 정도로 단순 업무이자 일상의 연속이다. 그들은 칠성판이라 불리는 고문대에 묶인 김종태에게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을 하면서 일상의 대화로 빠져든다. 죽음과 일상의 편린이 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점(死點)을 넘나드는 김종태의 가늠키 어려운 고통과 과중된 ‘공사’량에 불만을 늘어놓는 고문 경찰관들의 하소연이 뒤섞인 공간의 이질적 풍경은 공포의 개념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남영동1985’가 말한 고문의 서사이자 또 하나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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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포는 보는 이들에게 잔인함의 기준점마저 흔들어 놓는다. 단순히 피와 살이 튀는 고어 영화의 그것을 넘어선 이 풍경은 한 가지 간과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과 영화 속 동어 반복의 장치로 인해 극대화 된다. 김종태와 고문 기술자들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를 남영동 대공분실 안에 가둬버린 정 감독의 또 다른 ‘고문’이 시작되는 점이다.

‘고문’은 영화 속 김종태와 영화 밖 관객들을 같은 호흡으로 흔든다. ‘장의사’ 이두한(이경영)이 가하는 고문의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김종태의 아픔이 전해질 찰나 고문은 끝난다. 수백 장에 달하는 종이에 김종태는 퍼즐조각으로 나뉘어 버린 기억을 짜 맞춰 간다. 끝났다고 여긴 순간 김종태가 짜 맞춘 기억은 하늘로 흩날려지고 다시 산산조각으로 부셔진다. 다시 고문은 시작된다. “이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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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굳건한 김종태에서 무너진 김종태로 무너져 간 모습에 고문 경찰관들도 이내 동정의 마음을 보낸다. 관객들은 마음을 놓은 채 “이제 끝인가”를 되 뇌일 때쯤 이두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극장 안을 울린다. 아니 김종태와 관객들의 뇌리를 마비시킨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결국 김종태와 관객은 몸으로, 또 뇌로 느끼고 기억한 고문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스라이 바스러져 간다. 잔인함과 고통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억이란 한 단어로 저장한 ‘남영동1985’의 모습은 분명 다른 그 어떤 영화와도 다른 결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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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남영동1985’가 말하는 것은 ‘고문’에 대한 것도, 가해자의 죄의식도, 피해자의 고통도 아닐 것이다. 단지 망각이란 이름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 기억의 관한 얘기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분명히 존재했고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그날의 일을 왜 기억하지 못하냐고 묻는 ‘단매’의 흔적 말이다. 그 흔적조차 기억의 단상 아닌가.

마지막 김종태와 이두한의 만남에서 그 기억은 말한다. 용서가 무엇이고 그 용서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는지. 어쩌면 ‘남영동1985’는 인간의 기억이 가진 ‘고문’보다 더한 고통을 호소하는지도 모른다. 그 고통이 바로 ‘남영동1985’ 속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심리적 괴리감의 불일치성이다. 마지막 김종태가 이두한을 바라본 뒤 관객들에게 돌리는 시선에서 그 괴리감은 기억으로 모습을 바꾼다. 당신은 기억을 용서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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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관한 영화 ‘남영동1985’다.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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