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인 지난달 하순 국세청이 발표한 내국인의 해외 금융계좌 신고 결과를 보고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전체적으로 지난해에 비해 신고계좌 수가 5231개에서 5949개로 14%, 신고금액이 11조5000억원에서 18조6000억원으로 62% 증가한 것은 그럴 수 있으려니 싶었다. 하지만 그 중 스위스 소재 금융계좌 신고액이 73억원에서 1003억원으로 1년 새 14배나 증가한 것은 특이했다. 신고자 수는 한 자리라고 국세청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귀띔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1인당 평균 100억원 이상의 거액을 스위스 비밀계좌에 넣어두고 있었다는 얘기다.
국세청은 납세자 비밀 보호를 이유로 개인별 신원 공개를 거부했지만, 그들은 국내에 뭔가 지켜야 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개정된 한ㆍ스위스 조세조약 발효는 오래 전 예고된 것이었으니 돈을 그 사이에 다른 조세피난처로 옮길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놔두었다가 이번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합법화 절차를 밟아 은닉자금을 역(逆)세탁함으로써 자신의 국내 재산이나 사회적 위신을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한 가지 결론은 그들의 신고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과 달리 국내에 지켜야 할 것이 많지 않거나 뒤가 구린 돈을 스위스 계좌에 넣어두었던 사람들은 돈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 신고의무를 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스위스 계좌에 수십억~수천억원대의 돈을 넣어둔 한국인이 적지 않았고, 어쩌면 수조원대의 돈을 넣어둔 한국인도 있었을지 모른다.
전체로는 1970년부터 2010년까지 40년 동안 139개 개발도상국에서 조세피난처로 빼돌려진 돈이 최소 21조달러 이상으로 추정됐다. 그 돈이 외딴 조세피난처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를 제공하는 UBS나 골드만삭스 등 선진국 거대 은행들이 관리하고 굴려준다. 그 중에는 국제적 사업망을 갖춘 기업 조직을 통해 빼돌려진 돈이 많을 것이다. 한국(7793억달러)은 중국(1조1893억달러)과 러시아(7977억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빼돌려진 돈이 많은 나라다. 이 방면에서 국세청이 해야 할 일이 많다.
이주명 논설위원 c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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