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食이' 할아버지들의 '식사 자립 선언'
앞치마 두른 할아버지들의 ‘건강과 사랑이 있는 밥상’
[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끼니를 가족들에게 의존해왔던 할아버지들의 작은 반란이 시작됐다. 그들은 젊은 동안 일에만 매달리느라 가사같은 건 신경을 쓰지 못 했다. 이제 은퇴하고 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매번 식사 때면 아내나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일이 허다해졌다. 그런 할아버지들이 '식사 자립'에 나섰다. 언뜻 백발이 성성하고 돋보기 안경을 쓴 할아버지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도마 앞에 선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 장면이다.
조금 어설픈 손길로 손수 식사 자립에 나선 할아버자들은 양념을 하는 순서도, 어느 정도 양을 넣어야 하는지도 헷갈린다. 맛 또한 장담하긴 이르다. 하지만 베테랑 주부만큼이나 음식과 요리를 향한 열정은 뜨겁다. 한 할아버지는 "우리 같은 노인들을 삼식이라고 놀리지 ? 나이 먹고 집에서 눈칫밥 먹느니 간단한 거라도 배워서 직접 해 먹어야 겠어"라며 웃었다.
17일 오후 강남구 압구정 노인복지센터. '건강과 사랑이 있는 밥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할아버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난 두 번의 요리강좌에서 익힌 내용과 소감을 공유하고 토론하기 위해서다. 어르신들은 지난 3일과 10일 각각 밥과 된장국, 겉절이와 북엇국 조리법을 익혔다.
그동안 배운 것을 발표하는 시간이 되자 할아버지들의 말문이 거침없이 터져나왔다. 모두들 진지했다. 몇몇 할아버지는 각자가 복습하면서 얻은 내용과 시행착오를 소개하기도 했다.
손형렬(82ㆍ강남구 압구정동) 할아버지는 "두 번째 수업 때 태어나서 처음 북엇국을 끓여 봤다"며 "양념을 하고 육수를 만드는 게 여간 헷갈렸는데 이것저것 넣으면서 해 보니까 조금씩 감이 잡히더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온 황차랑(69) 할아버지는 "직접 만든 겉절이를 집사람과 딸에게 보여줬더니 식당 차려도 되겠다며 좋아했다"며 "좀 더 연습해 가족들에게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요즘 같이 포장돼서 그저 먹기 편하라고 나온 음식들은 사랑과 정성이 빠져 있어 진짜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 주위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반면 자신의 음식이 혹평을 받아 머쓱했다는 의견도 나와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고영일(71ㆍ강남구 논현동) 할아버지는 "겉절이를 해 집에 가져갔더니 집사람이 좋은 평가를 하지 않더라"며 "양념 수가 많고 조절하기기 어려워 하루 이틀 해서는 안 될 같다"고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아내가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나가는데 한 번 나가면 열흘 씩은 집을 비운다"며 운을 뗀 강석주(70ㆍ강남구 청담동) 할아버지는 "맨날 사먹을 수도 없으니까 내가 몇 가지는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참가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프로그램을 담당한 장현진 복지사는 "반응이 좋아 배우고 싶다는 할아버지들이 많아졌다"며 "앞으로 계속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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