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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의 X-파일]니시오카, 왜 기본기 미달 선수로 전락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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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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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8일 미네소타 트윈스 홈구장 타겟필드에서는 일본인 선수의 입단 기자회견이 열렸다. 주인공은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유격수로 뛰었던 니시오카 츠요시. 미국 진출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해 일본리그에서 206안타를 치며 선수단을 저팬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까닭이다. 타율은 3할4푼6리나 됐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니시오카는 “트윈스의 일원이 된 것에 매우 흥분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당초 그는 등 번호로 지바롯데에서 사용한 7번을 희망했다. 하지만 팀 간판 포수 조 마무어의 선점으로 1번을 받아들였다. 니시오카는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주로 톱타자로 뛰었다. 미네소타에서도 1번을 달고 1번 타자로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싶다”라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자회견장에는 연고지인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 출신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4년) 폴 몰리터도 함께 자리했다. 현역시절 2루수로 뛰며 통산 3314안타를 때려낸 그는 “니시오카가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 후견인(God Father)이 되어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기대를 드러낸 건 미네소타 구단도 다르지 않았다. 이전까지 주전 유격수를 담당했던 J,J 하디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시켰고 2루수 올랜도 허드슨, 내야 유틸리티 요원 닉 푼토와의 재계약을 모두 포기했다. 빌 스미스 미네소타 단장은 “올 시즌 우리 팀은 조금 더 빠르고 젊은 팀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감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끔찍한 몰락의 출발점이 됐다. 2010시즌 94승 68패로 2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를 재패했던 미네소타는 지난 시즌 63승 99패를 기록하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다. 형편은 올 시즌도 비슷하다. 56경기를 소화한 8일까지 22승(34패)을 챙기는데 그치며 아메리칸리그 꼴찌에 머물러 있다. 니시오카는 올해 메이저리그 무대에 한 차례도 서지 못했다. 68경기에 나선 지난 시즌 성적은 타율 2할2푼6리 19타점 2도루. 메이저리그는 결코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다.
PL 학원고 진학을 꿈꿨던 소년

니시오카는 1984년 7월 27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야구공을 처음 잡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야구부를 운영하는 사쿄초등학교로 전학을 강행했다. 그해 겨울 그가 속한 나라 리틀리그 출신의 두 선배는 PL 학원고 진학을 확정지었다. 이들은 PL 학원고 유니폼을 입고 선배들에게 타격을 지도받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니시오카는 PL 학원고 진학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PL 학원고 유니폼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고시엔(일본고교야구 하계전국대회)이 열리는 8월만 되면 고시엔구장으로 달려가 PL 학원고를 목청이 터지도록 응원했다. 머릿속엔 오로지 PL 학원고의 유니폼밖에 없었다.”
PL 학원고에 대한 애정은 초등학교 졸업문집에도 발견된다. 장래희망 란에 니시오카는 다음과 같이 써내려갔다.

‘야구를 열심히 해서 오사카 최고 야구 명문 PL 학원고에 진학하고 싶다. 유니폼을 입고 반드시 고시엔 무대를 밟고 싶다. 졸업 뒤에는 프로에 진출해 많은 돈을 벌겠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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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는 히라조히가시중학교 진학 이후 꿈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배트를 휘둘렀다. 의지는 상당했다. 매일 1천 번 이상 스윙을 연습했다. 토스는 아버지 니시오카 쿠니아키가 자청했다. “매일 1천 번 이상 스윙을 해야만 한다”는 어린 아들의 말에 “봐주지 않겠다”며 승부욕을 이끌어냈다. 계속된 강행군에 손바닥은 정상일 리 없었다. 껍질이 수차례 벗겨져 배트를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통증을 호소하는 아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 입으로 매일 1천 번씩 스윙을 하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라. 손바닥이 까졌다고 포기할 셈이냐”라며 호되게 다그쳤다. 강압적인 연습에 니시오카는 야구에 대한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다. 배트를 내려놓을 생각까지 했다. 이런 그를 다잡은 건 다름 아닌 초등학교 졸업문집이었다. 니시오카는 “공부를 하려고 펜을 잡았지만 야구선수가 아니면 막노동판을 전전할 것 같았다”며 “우연치 않게 다시 보게 된 졸업문집에서 장래희망을 확인하고 아버지와의 스윙 연습을 재개했다”라고 밝혔다. 공을 들고 다시 찾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반갑게 맞아줬다. 묵묵히 1천 번 공을 던져주며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 프로선수도 실천하기 힘든 자신과의 싸움에 니시오카가 성실한 태도를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혹독한 훈련 속에 기량은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PL 학원고 스카우트에게서 관심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는 영입 제의로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니시오카는 고교 진학을 앞두고 야구부 담당 교사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달받았다. PL 학원고의 영입 계획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이틀 동안 학교를 결석한 채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았다. 니시오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다.”

니시오카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홀로 PL 학원고로 찾아가 열심히 뛰겠다는 의지를 거듭 피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잇단 설득에 학교 관계자들은 “주전으로 출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만 내놓았다. 니시오카는 PL 학원고를 빠져나오며 이내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타도, PL 학원고’였다.

안티 PL 학원고 선봉장, 왜 지바롯데였나

니시오카는 PL 학원고의 라이벌인 오사카 토인고에 진학했다. 야구부에는 쟁쟁한 선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전 유격수를 꿰찬 2년 선배 나카지마 히로유키, 1년 선배 나카무라 다케야(이상 세이부 라이온스) 등이다. 1학년의 니시오카는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2루수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센바츠(일본고교야구 춘계전국대회) 오사카 지역예선에서 복수의 기회를 잡았다. PL 학원고 더그아웃은 학교까지 찾아와 영입을 요청했던 니시오카의 플레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5회 강우콜드게임으로 가진 재대결에서 니시오카는 세 번째 타석까지 무안타에 그쳤다. 취소된 첫 경기를 포함하면 5타수 무안타였다. 네 번째 타석에서 그는 터닝 포인트를 마련했다. 볼넷을 골라 1루에 안착했다. 토인고 타선은 이를 시작으로 대량득점에 성공, 경기를 승리로 매듭지었다. 경기 뒤 니시오카는 더그아웃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안타를 치지 못해 생긴 원통함과 승리의 기쁨이 뒤섞여 나온 표현이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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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는 이후 재학 기간 가진 PL 학원고와의 네 차례 공식경기를 모두 승리를 이끌었다. 사실 PL 학원고에 진학하지 못한 건 호재에 더 가까웠다. 그가 2학년이던 2001년, PL 학원고가 야구부원 집단구타파문에 휘말려 일본고교야구연맹으로부터 2년 공식경기 출장 정지 중징계를 받은 까닭이다. PL 학원고의 ‘PL’은 ‘완전한 자유(Perfect Liberty)’를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선수들은 수십 년 동안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그간 일본 고교야구에서 선후배간의 집단구타, 학교 차원의 조직적 은폐가 벌어지는 대표적인 학교로 손꼽혔다. 니시오카는 학창 시절은 물론 프로 진출 이후에도 ‘건방지다’, ‘무례하다’, ‘싹수가 없다’ 등의 비난에 자주 시달렸다. PL 학원고에 진학했다면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한 지금의 니시오카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학년 때부터 주전 유격수로 활동한 니시오카는 넓은 수비범위와 강한 어깨, 맹타 등으로 스카우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가장 돋보인 건 장타였다. 토인고 유니폼을 입은 3년 동안 무려 42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특유 타격 센스도 빼놓을 수 없다. 상대수비가 장타를 의식해 뒤로 물러나면 1-2루 사이로 기습번트를 대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은 니시오카를 가만둘 리 없었다. 2001년 7월 마츠모토 나오키 지바롯데 스카우트는 직접 명함을 건네며 “신인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부드러운 마츠모토 스카우트의 인상에 니시오카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입단을 생각했다. 1학년 때부터 “신인드래프트 3순위로 지명하겠다”라며 언질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명함을 건네받은 그는 “죄송하지만 지바롯데를 12개 구단 가운데 가장 싫어한다. 만약 나를 지명한다면 도쿄 6대학리그 소속 대학교에 진학하겠다”라고 못을 받았다. 마츠모토 스카우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을 진학하던 사회인 야구에서 뛰던 언제나 당신을 응원하겠다. 당신의 플레이는 지바롯데를 매료시켰다”라고 말했다. 1년여 뒤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바롯데는 예상대로 니시오카를 1순위로 지명했다. 중계방송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확인한 니시오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튿날 토인고에서 만난 마츠모토 스카우트에게 “왜 나를 지명했느냐? 나는 센트럴리그 구단에 입단해서 유명해지고 싶다”라고 따져 물었다. 마츠모토 스카우트는 막무가내로 덤비는 니시오카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지바롯데의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가 되어 달라. 우리 구단은 당신이 그럴만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재차 설득에 나섰다. 니시오카는 “나는 스즈키와 비교할만한 대상이 아니다”라며 수억 엔의 계약금을 요구했다. 입단을 거부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츠모토 스카우트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금액이군요”라며 바로 요구액을 수락했다. 니시오카는 그날 저녁 부모님과의 긴 토론 끝에 지바롯데 입단을 결정했다. 그는 훗날 입단을 결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청난 계약금 때문이 아니었다. 마츠모토 스카우트가 점심으로 사준 오코노미야키가 너무 맛있어서였다.”

사실 마츠모토 스카우트의 지명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해 그는 스카우트 2년차에 불과했다. 니시오카의 1순위 지명 방침 피력에 다른 스카우트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마츠모토 스카우트는 초강수로 잡음을 잠재웠다.

“니시오카는 3년 내 지바롯데의 주축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바로 사표를 제출하겠다.”

스위치히터 전향으로 얻은 새로운 인생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니시오카는 데뷔 시즌인 2003년 1군 경기를 7번(11타석) 출장하는데 그쳤다. 처참한 성적은 2군도 다르지 않았다. 타율 2할1푼6리로 규정타석을 채운 이스턴리그 타자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부진이 계속되자 타격코치로 1, 2군을 순회하던 다카하시 요시히코는 우투좌타로 뛰던 그에게 스위치히터로의 전향을 권유했다. 다카하시는 일본리그에서 스위치히터로 전향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인물이다. 프로 3년차였던 1978년부터 타격에 변화를 줬는데 이후 5시즌 동안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20홈런 고지 밟은 시즌도 네 차례나 됐다. 다카하시는 매일 왼쪽에서 500개, 오른쪽 타석에서 500개의 스윙 연습을 지시했다. 니시오카에게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1천 번 스윙 연습이 떠오를 만큼 혹독한 과정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오른쪽 타석에서 배트를 500번 돌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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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개막 뒤에도 다카하시 코치의 레슨은 멈추지 않았다. 홈경기를 마치면 구단 숙소에서, 원정경기를 끝내면 호텔 옥상에서 매일 1천 번씩 배트를 휘두르게 했다. 새벽 2시까지 이어진 연습이 피로를 불러일으킨 건 당연했다. 매 수비 집중력이 요구되는 내야수 니시오카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다카하시 코치에게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까지 연습하고 내일부턴 하지 말자”라며 더 세게 채찍질을 가했다. 훗날 니시오카를 당시를 회상하며 “그 옛날 아버지의 엄격함이 떠올랐다”라고 말했다.

피나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니시오카는 스위치히터 전향 2년만인 2005년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해 122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8푼2리를 기록하며 타선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빛을 발휘한건 배트만이 아니었다. 특유 주루 센스로 41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퍼시픽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바비 발렌타인 당시 지바롯데 감독은 유격수에 32살의 고사카 마코토, 2루수에 36살의 호리 고이치를 각각 주전으로 기용하며 니시오카를 두 포지션을 모두 받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용했다. 타순도 1번, 2번, 7번, 9번 등으로 들쑥날쑥하게 맡겼다. 지바롯데는 그해 많은 야수들을 플래툰으로 기용하는 변칙타순으로 재미를 보며 31년 만에 저팬시리즈에서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니시오카는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여전히 발렌타인 감독의 선수기용에 불만을 드러냈다. “내가 두 선배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라며 선수단 운영에 정면으로 반발했다. 시즌 뒤 문제는 손쉽게 해결됐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고사카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둥지를 옮긴 까닭이다.

니시오카는 이듬해 주전 유격수 겸 1루수로 고정됐다. 그리고 화려한 수비로 이내 많은 야구팬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초반 타구 음이 전해지는 동시에 내딛어야 하는 퍼스트 스텝이 다소 느리다고 평가받았지만 빼어난 운동능력으로 이를 극복해냈다. 오히려 안타로 연결될 법한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 잡아내며 아웃카운트를 늘려 야구관계자들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건 투수의 키를 넘어 2루 베이스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안타성 타구. 이를 아웃으로 수차례 연결하자 발렌타인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저런 수비를 보여주는 내야수는 드물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니시오카가 실책과 거리가 멀었던 건 아니다.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흐르는 깊은 타구를 급하게 처리하다 원바운드 송구를 범해, 실책이나 내야안타를 적잖게 허용했다. 하지만 강한 어깨만큼은 리그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는 2006년 6월 20일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한신과의 교류전에서 야구관계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경기 전 펼쳐진 구속 측정 콘테스트에서 두 팀 야수 통틀어 가장 빠른 시속 142km를 찍었다.

무례한 니시오카? 사나이 니시오카!

니시오카는 무례하다는 평이 잦다. 일본에서 뛰며 “야구는 잘하지만 예의가 없다”, “후배를 다독여줄 리더십이 없다” 등의 비판에 자주 시달렸다. 하지만 이는 매사 저돌적인 행동에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 생긴 오해에 가깝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지바롯데 1, 2군 순회코치 재직 당시 3안타를 몰아친 니시오카를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다. 타격감을 묻는 질문에 다소 건방진 말투로 “그럭저럭 괜찮았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니시오카는 김 코치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깍듯하게 스승으로 모셨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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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평가는 세간과 다르다. 특히 야구에 대한 열정이 크고 실력이 뛰어난 선수에겐 다정다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경외의 대상은 팀 동료였던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이었다. 일본 진출 첫 해였던 2004년 타율 2할4푼 14홈런에 그친 그는 이듬해 김성근 코치의 지도 아래 하루 2천 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이를 지켜본 니시오카는 “나는 1천 번의 스윙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이승엽은 그 두 배를 소화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승엽은 2005년 시범경기에서 타율 5푼(20타수 1안타)을 기록하는데 그치며 시즌 개막을 2군에서 맞았다. 니시오카는 바로 분개하고 나섰다.

“이승엽은 하루 2천 번씩 스윙을 연습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다. 시범경기에서 조금 맞지 않았다고 2군으로 내려보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발렌타인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즌 내내 플래툰이라는 족쇄를 채우며 규정타석(453타석)도 되지 않는 445타석만을 제공했다. 이승엽은 실력으로 장애를 뛰어넘었다. 그해 30홈런을 때려내며 자존심을 회복했다. 시즌 30호 홈런이 터진 건 9월 23일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원정경기. 당시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와 이승엽에게 축하를 건넨 건 니시오카였다.

니시오카는 이 같은 리더십을 인정받아 2010시즌 사토자키 도모야로부터 선수단 주장직을 넘겨받았다. 지바롯데 구단은 그의 유니폼 상의 왼쪽 가슴에 캡틴을 상징하는 ‘C’ 로고를 선사, 믿음을 표시했다. 니시오카는 선후배는 물론 외국인선수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4번 타자 겸 1루수로 기용된 김태균(한화 이글스)도 여기에 해당됐다. 그는 전반기 동안 타율 2할8푼 18홈런 73타점의 맹활약을 뽐냈지만 후반기 체력 저하와 상대의 집요한 분석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니시오카는 이런 그에게 끊임없이 응원을 건넸다. 21개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갈 때마다 꼬박꼬박 하이파이브를 해준 것은 물론 그해 12월 10일 고교선배 나카지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김태균의 결혼을 축하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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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니시오카는 두 차례나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김태균은 갑작스레 퇴단을 선언한 뒤인 지난해 12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지바롯데에서) 누구도 내게 ‘잘했다’, ‘고생했다’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 용병은 팀 성적과 관계없이 무조건 자기 성적을 내야 하더라”라고 토로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지난해 2월 지바롯데 전지훈련지였던 이시가키 섬에서 가진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였다. 그는 “니시오카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내 할아버지도 경상남도에서 오사카로 건너온 한국인이다. 나도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다’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많이 줄었지만 일본 사회 내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야구계도 다르지 않다. 니시오카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밝힌 내용은 비밀로 붙여달라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태균은 이를 지켜주지 않았고 그해 31경기에서 홈런 1개를 기록한 채 한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직접 밝힌 퇴단의 이유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와 허리부상 치료였다.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다

니시오카는 2010시즌 새로운 목표를 내걸었다. 전 경기 무 교체 출장이다. 그는 초반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692타석을 밟으며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타석 신기록을 작성했다. 그 속에서 가장 눈에 띈 건 특유 몰아치기였다. 3안타 이상을 때려낸 건 무려 27경기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니시오카는 206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생애 최고인 타율 3할4푼6리를 기록했다. 역대 일본 프로야구에서 한 시즌 200안타 이상을 때려낸 다섯 번째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앞서 기록을 달성한 건 스즈키 이치로, 아오키 노리치카(밀워키 브루어스), 알렉스 라미레즈(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맷 머튼(한신 타이거즈)뿐이다. 이 가운데 내야수는 니시오카가 유일하다.

그해 지바롯데는 후반기 연전연패를 거듭했지만 퍼시픽리그 3위를 기록, 턱걸이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니시오카는 내려앉은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했다. 포스트시즌 돌입을 앞두고 “우승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5년 전 리그 3위를 하고도 저팬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영광은 올해 분명 재현될 것”이라며 팀 동료들을 독려했다. 그의 말대로 지바롯데는 포스트시즌에서 세이부와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모두 물리쳤다. 승승장구는 저팬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주니치 드래건스를 4승 1무 2패로 제치고 우승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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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직후 니시오카는 블로그를 통해 깜짝 소식을 알렸다.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보는 것이 꿈이었다. 내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도전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그해 11월 26일 공개된 포스팅 결과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적어내 구단은 532만 9천 달러(약 109억 원)의 미네소타였다. 미네소타 구단은 12월 17일 니시오카와 3년 925만 달러(약 109억 원)에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소식을 전달받은 발렌타인 감독은 바로 그의 도전에 힘을 불어넣었다.

“메이저리그의 벽은 높지만 공격, 수비, 주루 능력을 모두 갖춘 팔방미인의 니시오카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치로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니시오카는 지바롯데 감독 시절 메이저리그로 가장 데려오고 싶은 선수였다. 그가 이치로의 뒤를 이을 것으로 확신한다.”

‘미스터 하이라이트 필름’에서 ‘에러 제조기’로

니시오카의 메이저리그 행 확정에 많은 선수들은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이 가운데 가장 기뻐한 이는 마쓰이 가즈오였다. 2004년부터 7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누빈 그는 지난 시즌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둥지를 옮겼다. 마쓰이는 니시오카의 고교 시절 롤모델이다. 니시오카는 프로 데뷔 당시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빼어난 운동능력, 넓은 수비범위, 어떻게든 타구를 처리하겠다는 집념, 스위치히터로서의 타격능력 등이 모두 대단한 선배다. 그처럼 프로무대에서 성공하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다. 마쓰이는 니시오카의 고향 선배이기도 하다. 오사카 출신으로 유년 시절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PL 학원고를 졸업했다. 마쓰이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9살 어린 후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타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고 강하다. 퍼시픽리그 경기는 대부분 돔구장에서 열려 강한 타구를 정 위치에서 포구해 처리하면 그만이다. 천연잔디는 다르다. 타구 속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앞으로 대시해 타구를 처리해야 한다. 비교적 덩치가 큰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느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메이저리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선수들이 즐비하다. 일본에서와 같이 기다렸다 타구를 처리한다면 세이프를 내주고 말 것이다. 어깨가 강하다고 확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메이저리그에서 더 강한 어깨를 자랑하는 내야수는 쉽게 발견된다. 솔직히 걱정되는 점이 많다. 병살 플레이 연결에서 베이스를 커버하는 타이밍이 늦어 보인다. 송구에서 1루 주자의 태클을 피하는 동작도 굼뜨다. 일본에서는 전반적으로 동업자 의식이 깔려있어 거친 슬라이딩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메이저리그는 그렇지 않다. 조금만 타이밍이 늦으면 태클에 부상을 당할 수 있다. 2루수 수비 때 베이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비 위치를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피할 점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2루 사이 깊숙한 위치까지 이동해 수비하는 경우가 많다. 병살타성 타구가 생기면 타구를 인식하는 즉시 2루 베이스로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 그래야만 유격수나 3루수의 송구를 잡을 수 있고 1루 주자의 거친 태클을 최대한 피할 수 있다. 니시오카는 지난 5년 동안 주로 유격수로 뛰었다. 2루수의 수비요령이 몸에 베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 주 : 퍼시픽리그 6개 구단 홈구장 가운데 천연잔디가 심어진 곳은 오릭스 버팔로스의 제 2 홈구장 고베 호토모토 필드가 유일하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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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는 지난해 2월 2일 간사이공항을 통해 미네소타 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프링캠프 개막일은 18일이었고 야수 조의 소집일은 24일이었다. 3주가량 먼저 도착해 컨디션 회복을 노린 셈이다. 미네소타에 도착한 니시오카는 3일 만에 토쿠자와 나오코와의 신혼집을 마련하고 6일 플로리다 주 포트 마이어스에 마련된 미네소타 스프링캠프지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입단 기자회견에서 기대를 드러냈던 몰리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니시오카는 그의 도움 속에 바로 2루수 적응 훈련에 돌입했다. 성실한 훈련에 론 가든하이어 감독, 빌 스미스 단장 등은 연거푸 신뢰를 보냈다. 합격점을 얻은 건 태도만이 아니었다. 니시오카는 시범경기에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 13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내며 타율 3할4푼5리를 기록, 타격능력에 의구심을 품은 현지 기자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문제는 수비였다. 빠르고 강한 타구를 적잖게 놓쳤고 병살 플레이 연결에서도 아슬아슬한 베이스 커버를 노출했다. 유격수 알렉시 카시야와의 의사소통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선수는 모두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이에 AP 통신의 야구 칼럼리스트 존 크라우진스키는 2월 24일자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시했다.

“미네소타 스프링캠프장 내야에서는 ‘I Got It!(내가 잡을게!)’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대신 ‘로 텡고!(Lo Tengo!, 카시야)’와 ‘와따시와 소레 오 모테(니시오카)’라는 말이 번갈아 울려 퍼진다.”

동양인 내야수의 메이저리그 진출 위험하다?

니시오카는 우려를 딛고 그해 4월 1일 열린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다. 만 26살이던 그는 메이저리그무대를 밟은 일본인 야수 가운데 최연소 출장자가 됐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6일 뒤 벌어진 뉴욕 양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마쓰이 등이 우려한 문제가 현실로 나타난 까닭이다. 7회 양키스 공격 1사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마크 테세이라는 3루수 앞 땅볼을 날렸다. 3루수 데니 발렌시아는 타구를 포구, 그대로 2루를 향해 던졌다. 니시오카는 공을 잡아 베이스를 찍은 뒤 바로 1루 송구를 노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병살을 막기 위해 몸을 옆으로 날린 1루 주자 닉 스위셔의 다리에 왼다리 정강이가 충돌하고 말았다. 그라운드에 쓰러진 니시오카는 그대로 병원으로 후송됐다. 정밀 검진 결과 드러난 병명은 왼다리 정강이뼈 골절. 스위셔는 바로 니시오카와 미네소타 구단에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구했다. 하지만 다수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상의 근원이 스위셔의 거친 플레이가 아닌 니시오카의 미숙한 몸동작에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관계자는 “니시오카는 어깨가 약한 탓인지 점핑 스로우로 공을 던져 타자를 아웃시킬 확신이 없어 보였다”며 “부상은 이 같은 소심한 플레이에서 비롯됐다. 메이저리그 주자들의 병살 저지 동작이 거칠다는 것쯤은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뛰어야 했다”라고 질책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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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는 4주간의 재활을 거친 뒤 미네소타 산하 마이너리그 트리플A 팀 로체스터 레드윙스로 이동했다. 그는 몰리터의 개인 지도 아래 병살 플레이의 기본을 다졌다. 그리고 6월 16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며 메이저리그 복귀를 알렸다. 이어진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병살 플레이 상황에서 트라우마에 빠진 모습을 여러 차례 노출했고 쉬운 타구를 적잖게 놓치는 실책도 범했다. 인필드 플라이 볼마저 낙구하는 모습에 가든하이어 감독은 불같이 화를 냈다. 수비에서의 위축은 곧 타격 부진으로 연결됐다. 니시오카는 일본리그에서 왼손투수를 상대로 자신의 통산 타율(0.293)보다 높은 3할2푼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달랐다. 2할3리를 때리는데 그치며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일본에서 그는 왼손투수의 직구를 밀어 쳐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서 기술은 거의 파울을 제조하는데 머물렀다. 형편은 변화구 공략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일본에서 다양한 방면에 떨어뜨린 안타는 재현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투수들 앞에 선 그는 그저 헛스윙과 뜬공으로 물러나기 바빴다. 잇단 부진 속에 니시오카는 타율 2할2푼6리 OPS(출루율+장타율) 0.527 2도루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CBS 스포츠라인’은 바로 ‘최저수훈선수(Least Valuable Player)’ 후보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얼티밋 존 레이팅(Ultimate Zone Rating)은 야수의 수비력을 측정하는 세이버매트릭스 지표 가운데 어느 정도 공신력을 인정받는 잣대다. 야수의 수비범위가 어느 정도인지와 호수비로 얼마나 실점을 막아냈는지를 숫자로 환산해준다. 니시오카는 주 포지션인 2루수에서 -1.1, 카시야의 부상으로 대신 맡은 유격수 수비에서 -6.3을 기록했다. 실점을 저지하기는커녕 형편없는 수비로 상대팀에 7.4점을 헌납했다는 결과다.

재기를 다짐한 올 시즌은 더 암울하다. 시범경기 때부터 부진을 거듭하더니 왼손 소지 부상을 이유로 3월 19일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다. 사유는 부상이었지만 미네소타 지역지 세인트폴 파이오니아 프레스와 미네아폴리스 트리뷴의 기자들은 모두 다른 이유를 거론했다. 기량 미달이었다. 악재는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대두됐다. 스프링캠프를 눈앞에 둔 2월 1일 일본의 스포츠신문들은 일제히 니시오카와 토쿠자와의 이혼이 임박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내세운 근거는 혼외정사였다. 니시오카는 결혼 전부터 2살 연상의 그라비아 아이돌 출신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데 지난해 2월 포트 마이어스 스프링캠프지에 이 여성을 동행시켰다. 동행 사유는 영어 구사에 서툰 자신을 위한 통역. 하지만 일본 취재진과 미네소타 구단 관계자들은 그녀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둘은 스프링캠프가 끝난 뒤 미네소타에도 함께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쿠자와는 임신 5개월인 상태에서 불륜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부부 사이에 생긴 균열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그해 여름 태어난 귀여운 딸 세나도 소용없었다. 결국 둘은 일본에 귀국한 10월 별거에 들어갔고 이내 이혼 절차를 밟아나갔다. 지난 4월 30일 일본 매체들은 둘의 합의 이혼을 전하며 위자료 지급에 대한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토쿠자와 측 변호사가 요구한 위자료는 무려 6억 엔(약 89억 원)이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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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는 올 시즌 아직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트리플A 로체스터에서의 성적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난항이 예상된다. 8일까지 치른 34경기에서 남긴 기록은 타율 2할2푼6리 1홈런 7타점 OPS 0.599 등이다. 미네소타 지역 언론들은 모두 남은 시즌 반등에 성공할 확률을 희박하게 내다본다. 벌써부터 올 시즌 뒤 방출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보도한다. 니시오카의 메이저리그 실패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유격수로 군림한 이종범이 주니치 입단 이후 일본 언론으로부터 “수비의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내야수”라는 혹평에 시달렸던 점과 오버랩이 된다. 두 선수는 모두 부족한 타구 판단능력을 출중한 운동능력으로 메워냈다. 하지만 상위 레벨 리그에 진출한 이후 타구판단, 포구, 송구, 더블플레이 연결동작 등의 기본기에서 부족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니시오카의 도전이 실패로 매듭지어질 경우 일본은 물론 한국 내야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한동안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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